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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Feb 10. 2020

[오늘의 私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맥락적으로 보면


 숙명여대의 트랜스젠더 합격생이 결국 입학을 포기했다. 소위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들의 반발이 거셌다.


 입학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합법성과 소수자 보호를 강조했다. 반면 소위 페미니즘 계열은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는) 남성과의 공동생활이 불편하며, 이들에게 가부장제의 희생양인 여성의 몫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관념적이고 선언적인 주장들이다. ‘입장’을 핑계 삼아 쏟아 낸 주관적 신념 혹은 편견이다. 그러니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 논쟁을 거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증폭, 확장된다.


 사회적 논쟁이 생산적이려면 그것이 발생한 구체적 맥락을 의식해야 한다. 똑같은 트랜스젠더 이슈라 해도 작년인지 올해인지, 학교인지 직장인지에 따라 논점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맥락적 검토를 위해 숙명여대 사건과 트랜스젠더 군인의 전역 사건을 비교할 수 있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변희수 하사는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군은 강제 전역처분을 내렸다. 둘은 트랜스젠더 이슈라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발생한 맥락에서 차이를 보인다.


 군대와 대학이라는 구체적 조건을 고려해 두 사건을 살펴보자. 군대는 조직력에 기반하여 전투를 수행하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특정 구성원이 조직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장차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일단은 그를 조직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다. 군대는 보이스카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대학의 목적은 학문 수행이다. 인간과 사회에 유용한 지적 산물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러한 작업은 본질적으로 지적 마찰과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해 보지 않았던 생각, 막연한 불쾌함조차도 객관성을 갖춰 가는 과정에서 이론이 되고 논문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이번 논쟁을 촉발한 트랜스젠터 신입생은, 논쟁을 촉발했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대학의 값진 자원이 될 수 있었다. 예컨대 그(녀)를 향했던 소위 페미니스트들의 문제 제기, 이를테면 ‘트랜스젠더를 과연 여성이라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은 대자보가 아니라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끌어안을 만한 주제였다. ‘온갖 성범죄자들의 소굴이 되는 게 아니냐’는 문제제기는, 여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치안 확보를 위한 조사와 대안 마련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다분히 비타협적이고 혐오적인 발언들 속에서 숙명여대는 우리 사회에 일찍이 없던 학문적 고민과 발전의 호기를 놓친 셈이다. 


 영역을 구체화하고 맥락을 고려할 때 논쟁은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에 아이는 당황하지만, 어차피 정답은 없다. 그럴 때 '오늘 엄마에게 용돈을 받았고 아빠에게 야단 맞았다'는 조건을 근거로 아이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어른들의 짓궃은 물음에 울먹여본 적 있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달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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