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이 있다. 지하철 앞자리 남자의 얼굴이 꼴 보기 싫었다. 뭔가 이죽거리는 듯한 표정 같았다. 생판 모르는 남을 그렇게 미워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럼에도 그 면상에 주먹을 날리지 않은 건 이성 덕분이다. 또한 그 이성으로 터무니없던 내 마음을 바라보고 성찰할 수도 있었으니, 결국은 이성이 관용을 발휘한 셈이다. (물론 경찰서 신세를 면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관용이란 상대방에 대하여 '뭔가 거슬리는' 심적 동요조차 없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일 수 없다. 다만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상대에게 거부감이 차오를 때 스스로 ‘합리적 해명’을 요구하면서 자신을 통제하는 과정, 그것이 관용이다.
2. 관용은 선을 지우는 게 아니라 선을 긋는 일이다
나와 여러모로 다른 이성을 만난 적이 있다. 사실 ‘다름’도 어느 정도까지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은 벽에 부딪히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의 옹졸함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름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한다'고 했다.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려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 소인은 ‘동이불화’한다. 술자리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군자의 술자리는 똑같이 마시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흥겹다. 소인들은 그 반대다.
화이부동하려면 나와 너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 선을 긋는 것은 그 너머를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관계를 모색하기 위함이다. 결국 그분과는 헤어졌지만, 서로를 존중한 더 나은 길이었다.
3. 관용은 상대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1998년으로 기억한다. 남자들 사이에 귀 피어싱이 유행했다. 내 안에 놀부가 들어앉았는지, 그 꼬락서니를 보면 확 잡아당기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해 보지도 않고 비판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시험 삼아 왼쪽 귓불을 뚫어 보았다. 의외로 괜찮았다. 재미없는 얼굴에 작은 파격이 가해지자 나의 지평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경험과 생각에 갇혀 산다. 그래서 나와 다른 언행을 만나면 일단 불편하다. 하지만 그러한 마찰로 나의 영역이 넓어질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소수 견해의 보호를 강조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수의 견해가 맞다면 다수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다. 설령 틀리다 해도 다수의 견해를 더욱 공고화할 수 있다. 그러니 어느 경우든 소수의 견해는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관용이란 관용의 대상이 아니라 관용의 주체에게 도움이 된다. 광장의 맞은편에 선 깃발, 야릇한 향을 풍기는 외국인 노동자, 성전환 수술을 한 군인과 대학생... 관용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요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