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 부산 범어사역 인근에서 삼랑진까지

2018년 12월 13일

by 김정환


8시에 숙소를 나섰다. 여기는 부산의 끝자락이다. 이제 양산 방면으로 접어들면 아무것도 없는 국도가 이어질 터이다. 아침을 먹어두려 잠시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히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걸어 보기로 했다. 오늘의 일정은 양산, 물금을 지나 낙동강을 거슬러 삼랑진까지다.



예상대로 국도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짖어대는 개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란다. 여행 내내 이어진 '개소리'의 서막이었다.


쓰레기도 있다. 정성스레 동여맨 검은 비닐봉지부터 흩뿌려 놓은 신발까지, 국도변에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쓰레기가 나뒹군다.


사실 이 쓰레기들은 여정 초반이기에 신기해 보였을 뿐이다. 걷는 내내 국도변에서 온갖 종류의 쓰레기를 다 보았다.


그렇게 삭막하던 국도변에서 오아시스와도 같은 표지판을 만났다. 토스트 트럭이다.



천막 안은 따뜻했다. 추운 길을 걷다가 따뜻한 공기를 맞으니 갑자기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사장님께 토스트를 청했다. 하나에 2천 원인데 내용물이 실하고 아주 맛이 있다. 개당 오백 원씩 하는 오뎅도 식감이 좋다.



어디까지 가느냐는 물음에 '서울까지 걸어간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놀라는 눈치다. 여행길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남성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도보 여행에 동경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꿈꾸어 보았을 '행군'이자 '도전'이기 때문이다. 토스트 사장님도 그랬다.


하지만 사장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내가 생각이 많아졌다. 사장님은 나보다 두 살 연상으로, 딸 셋의 아버지다. 낮에는 자동차 관련 일을 하고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이곳에서 토스트 트럭을 운영한다고 하셨다.


그 치열한 삶의 모습과 가장의 무게를 덤덤히 견뎌 내는 표정 앞에서 가벼운 배낭의 나그네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값을 치르고 나서는 내게 사장님은 물 한 통과 따뜻한 캔커피를 건넨다. 벌써 직접 끓여 내신 아메리카노까지 얻어 마신 터였다. 아니, 이미 많은 성찰의 소재와 성실한 삶을 보여 주신 사장님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커피를 받아 든다. 사장님과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함께 사진을 찍은 후 다시 길을 떠난다. 손에 쥔 캔커피가 오랫동안 따뜻하다.


캔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꼭 쥐고 있었다. 토스트 사장님의 성실한 삶, 따뜻한 마음의 온기는 식지 않는다.


길은 드디어 부산을 벗어나 행정구역상 양산으로 접어든다.



양산은 이미 신도시로 상당히 개발되었으나 부산에서 양산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아직도 대규모 개발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토스트 사장님 역시 공사를 위하여 부산과 양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주 고객이라고 했다.


양산방향 국도변 오른쪽으로는 가림막이 길게 늘어서 있다. 가림막이 떨어진 사이로, 터를 닦는 토목공사 현장이 보인다.


다시 발이 아프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양말을 벗어 보니 물집이 잡히려는 듯 발바닥의 피부가 약간 밀려 올라가 있다. 꽤 통증을 느꼈지만, 장차 불바다가 될 것을 생각하면 이 때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다.


11시가 조금 안되어 양산 시내로 진입한다. 햇살이 몹시 강하다.



시내로 접어드는 길의 인도에는 대나무를 심어두었다. 예부터 양산은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많이 심었다. 지금도 양산 일대에 대나무 숲이 일부 남아있다고 들었다. 이 대나무길도 그러한 양산의 역사를 담아 조성되었을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면, 과거 양산은 그다지 물산이 풍부하지 못해 양산 일대의 모래를 타 지역으로 팔거나 대나무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양산 군수는 이웃인 밀양 군수 옆에 감히 앉지도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재의 양산은 대규모 신도시의 느낌이 강하다. 고층 아파트 단지와 낙동강 지류에 형성된 근린시설도 훌륭하다.


양산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있다는 것도 이날 처음 알았다. 그 바로 옆에 부산대 양산병원이 있으니 두 기관 사이에 협업이 이뤄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양산은 그 규모에 비해 오가는 사람이 정말 적다. 낮시간 내내 양산 시내에서 마주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식당이 위치한 곳은 CGV 근처다. 어느 지역이든 극장이 있는 곳은 중심가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도, 식당에도 사람이 없었다.


종업원의 말씀으로는 양산 주민들이 근무시간이나 여가시간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내기에 양산의 번화가라 해도 주말 정도만 반짝할 뿐이라고 했다. 과거부터 경제적 토대가 미미했던 양산의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인 모양이다. 양산은 부산의 베드타운, 딱 거기까지인 듯했다.


점심으로 먹은 일본식 덮밥과 식당의 모습이다.

발바닥이 몹시 아프다. 이쯤이면 물집이 제대로 잡힌 게 틀림없다. 근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앉아 양말을 벗으니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로 물집이 들어앉았다.


변기에 앉아서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을 관통한 후 물기를 빼냈다. 신중하게 물집을 짜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쳤다. 물집만 신경쓰다 문을 잠그지 않은 모양이다. '죄송합니다'며 황급히 나가는 사람에게 '괜찮습니다'고 답했다. 따지고 보면 내 실수가 아닌가.


여행 둘째 날의 첫 물집이다. 이후에 이어질 물집 세례와 피멍의 서곡이다.


물집을 짜고 밴드를 붙였다. 선크림을 한 번 더 바르고 다시 길을 나선다. 거대하고 조용한 신도시 양산의 아파트 사이를 지나 물금 쪽으로 내려간다.


이 정도 규모에 이토록 조용한 주거지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물금역에 이르렀다. 물금(勿禁)은 '금하지 말라'는 뜻이다. 삼국시대에 이 지역은 신라에 속했고 낙동강 맞은편에 가락국이 있었다. 자연히 두 나라 사이의 교류가 활발했는데, 교역상 편의를 위하여 이곳에서는 각종 금지나 규제를 하지 말자고 합의했고 그것이 '물금'의 유래가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경제자유구역'이었던 셈이다.



물금역을 지나면 낙동강 자전거길로 접어들 수 있다. 2016년, 자전거 국토종주의 마지막 날 달렸던 길이다. 자전거길로 이어지는 나들목 근처에 자전거 관련 가게들이 모여 있다.



낙동강 자전거길로 접어든다. 감회가 새롭다. '국토종주' 그 한 마디에 힘을 얻어 내달리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북에서 남으로, 지금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나무 데크로 이뤄진 자전거길로 연결된다. 자전거 국토종주의 백미로 꼽았던 바로 그 길이다.



길 옆으로는 옛 이야기가 담긴 경관들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자전거길 아래로 보이는 바위가 '경파대(鏡波臺)'다. 조선 고종조의 선비 정임교가 바위 위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운치를 즐겼다는 곳이다. 바위 어딘가에 '鏡波臺'라 새겨져 있다고 들었으나 햇살이 강해서인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자전거길 옆으로 간간이 기차가 지나간다. 경부선 철도다. <영남대로>에 따르면 지금 저 철길이 옛 영남대로의 흔적이다.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영남대로 답사를 위해 경부선 기찻길도 넘나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자전거길이 있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나의 목표는 영남대로 답사가 아니라 영남대로를 축으로 삼되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온전히 두 발로 걸어 올라오는 것이니 무리해서 영남대로를 따를 필요도 없다.



중간중간 간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면서 한숨 돌린다. 발이 점점 아파온다. 쉬는 동안에는 신발을 벗고 가급적 발을 높이 두었다.



그토록 쨍쨍하던 해가 어느덧 건너편 산봉우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두어 시간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 마음이 조금씩 급해진다.



뜨문뜨문 지나다니던 자전거의 인적도 끊겼다. 아무도 없는 강변길은 을씨년스럽다. 날씨는 춥고, 갈길은 멀었고, 발은 아팠다.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 양말을 벗어보니 발바닥과 닿은 부분에 물집이 터져 진물이 말라붙었다.



잠깐 숨만 돌린 것 같은데 그 사이 해가 많이 기울었다. 강 건너 노을 위로, 낮부터 떠올라 있었을 반쪽 달이 나를 빼꼼히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그때 오른편으로 작원잔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늘 일정 중 가장 기대했던 곳이다.


'잔도'란 벼랑 옆으로 낸 길을 말한다. 인근에 '작원관'이 있어 작원잔도라 부르는 것으로 짐작된다.


예부터 이 길은 영남대로 중 오가기 험난한 구간으로 유명했다. 가파른 벼랑 옆으로 돌을 쌓아 한 명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의 길을 냈다. 영남대로는 관리들이 공식적으로 이용한 관도(官道)인데, 윗사람의 행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속설도 전한다. 작원잔도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바로 그 길의 토막이다.


과연 벼랑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난 길을 걷노라면 현기증이 났을 법도 하다. 하지만 저곳에 저렇게 길을 내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놀랍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 돌을 세워 심고, 그 위에 디딤돌을 걸친 후 바닥돌을 얹었다. 평지에서 쌓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벼랑 끝에 힘겹게 걸쳐 있지만 어떻게든 보존하고 연구해야 할 역사다.



이제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무 데크 위로 걸어가는 내 발걸음이 한층 크게 울린다.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앉으니 청각이 예민해진다. 오른쪽 벼랑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철썩이는 소리, 뭔가 우는 듯한 소리에 머리칼이 쭈뼛 선다. 연암 박지원의 '일야 구도하기(一夜 九渡河記)'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연암은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후, 낮에는 보이는 것에 신경이 팔려 들리지 않던 물소리가 밤에는 그토록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인간은 감각에 휩쓸려 걱정을 지어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암은 이렇게 썼다.


吾乃今知夫道矣

나는 이제야 도를 깨달았다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는 귀와 눈이 누가 되지 않고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 큰 병이 되리라


(열하일기 심세편, <일하구도하기> 중에서)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을 잠잠하게' 할 만큼 도를 닦지 못한지라 스마트폰의 플래시 기능을 켜서 '눈을 믿는' 쪽을 택해 밤길을 계속 걸어 나갔다.



철길 아래로 난 터널을 빠져나가자 바로 작원관지다. '원'이란 관리들이 오가며 묵던 숙박시설이다. 작원관은 낙동강과 바로 붙어있어, 부산 방향으로 내려가는 관리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낙동강을 타고 올라오는 외적이 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피해 갈 수 없는 요새이기도 했다.


지금은 본래 있던 자리에서 약간 서쪽으로 옮겨 건물 일부를 복원했다고 들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터라 제대로 알아보지는 못했다. 어스름하게 보이는 팔작지붕이 으스스하기만 했다.


피로와 통증, 추위로 기진맥진할 때 즈음 드디어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랑진 읍내로 접어든 것이다.



우선 방을 잡기 위해 삼랑진역 앞에 있는 여관 두 곳을 찾았으나, 시설이 낙후된 것은 둘째 치더라도 남은 방이 하나도 없었다. 주인아저씨의 말씀으로는 근처에서 하는 사람들이 묵고 있어 방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택시로 5분만 가면' 시설 좋은 모텔이 있으니 그리로 가라 하신다. 실은 아까 걸어오면서 보았던 곳이다. 하지만 내게 '택시'를 탄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되짚어 가기에는 맥이 빠질 뿐만 아니라 너무 멀다.


일단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삼랑진역 앞 돼지국밥집으로 들어섰다.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테이블 사이를 오가면서 귀여운 사투리로 엄마를 부른다. 엄마가 가져다 준 돼지국밥은 국물이 맑고 시원했다.



식당을 나와 계란빵을 팔던 아저씨께 인근 지리를 물었다. 걷던 방향으로 좀 더 가면 여관이 하나 더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지도를 확인하니 대략 1.4km 정도다. 발바닥이 몹시 아팠지만 도리가 없다. 계란빵 두 개를 먹으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밥을 먹은 터라 조금 기운이 났다.


가는 길에 동네 빵집이 눈에 띄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빠리000'나 '뚜레00' 천지다. 그 지역에만 있는 빵집은 꼭 들르는 이유다. 다른 곳에서 잘 보지 못했던 빵을 두어 개 사서 가방에 담았다. 이 빵들은 다음날까지 간식 역할을 제대로 해 주었다.



드디어 숙소인 '낙동강 여관'에 도착했다. 미리 전화를 걸어 방이 있다는 언질을 받아 놓은 터다. 시설은 속칭 '달방'이라 하는, 인부들이 단기로 묵는 방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니다. 그나마 바닥이 따뜻한 것이 위안이 되었다. 값도 2만 5천 원으로 저렴하다.


왼쪽 사진 위로 보이는 줄은 빨래를 걸어 놓는 용도다. 바닥에는 종일 육체노동으로 힘든 사람들이 쉽게 전등을 끌 수 있도록, 머리맡까지 전등 스위치가 연결되어 있다.


다만 욕조가 없는 것이 아쉽다. 주인 아주머니께 대야를 청해 뜨거운 물을 받아 발을 담갔다. 오늘 걸은 거리가 대략 35km다. 발이 저릿저릿하다.


발바닥의 통증도 통증이지만 뒤꿈치가 너무 아팠다. 게다가 오른쪽 새끼발톱이 계속 눌려, 이 상태로는 발톱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일은 일단 발톱부터 깎아야겠다.


물집을 처치하고 자리에 누웠다. 2인용으로 바닥에 깔린 이불을 포개어 두텁게 깔고 덮었다. 머리맡의 스위치가 정말 편리하다. 불을 끄고 눈을 감자 어디선가 기차소리가 덜컹덜컹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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