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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K 사전쟁이

고인 물이 되기 싫었다

by 어슴푸레

1년에 몇 번 안 가는 친정이었다. 아버지는 늘 같은 말씀이셨다.


고인 물은 썩는 줄만 알어.

듣기 싫었다. 뻔한 월급에 아등바등 사는 딸이 안쓰러워 하는 말씀인지 모르지 않았다. 속에서 파르르 반발심이 일었다. 내색할 수 없었다. 자식들로 북적여 흐뭇한 당신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듣고 넘겼다. 아껴서 하는 말씀이니까. 잘살았으면 해서 하는 말씀이니까.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아버지와 작은 일에도 부딪쳤다. 가시 돋힌 말을 쏟아 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정전된 듯 당황했다. 구구절절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번쯤은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만큼 난 완강했다.



연차가 밥을 더 많이 먹여 주지 않았다. 연차는 근속 연수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차는 연차 이상의 능력을 요구했다. 까짓것, 하라면 하지.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별로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성취감이 컸다. 은근슬쩍 묻어가고 싶지 않았다. 매해가 브랜드 뉴(brand new)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다.



쌓인 연차만큼 <표준> 사전의 히스토리를 쫙 꿰고 있었다. '<표준>의 역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뿐이었다. 다른 누군가는 이런 나를 답답해했다. '고인 물'을 넘어 '썩은 물'이 되는 중이라는 걸 정작 나만 모르고 있었다. 고인 물에 폭우가 내려 씻긴다 해도 고인 물은 고인 물이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출근해서 피시(PC)를 켜고 <사전 관리 시스템>에 접속해 단순 띄어쓰기 오류를 고치는 일 정도는. 변변한 말뭉치 색인 편집기도 없이 속독하듯 좌에서 우로 빠르게 문맥 색인(Kwic: Keyword in Contex)을 훑는 것을 노안(老眼)이 더 이상 받쳐 주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 참조 말뭉치는 빈약하고 오래된 반면 말은 기하급수적으로 생기고 너무 빨리 변했다.



나만 고인 물이 된 게 아니었다. 말의 변화를 포착하고 쫓기에는 이곳도 심하게 고여 있었다.


고인 물은 썩는 것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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