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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몫, 세 몫을 하는 달걀

by 어슴푸레

나는 '달걀 예찬론자'다. 찬거리가 없어 냉장실이 휑해져도 그러려니 하지만 달걀이 떨어지면 안절부절못한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당장 사러 가야 한다. 여건상 사러 갈 수 없을 땐 식사 준비 전까지 B 마트에서라도 주문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날 저녁 메뉴에 달걀이 필요하지 않아도 일단은 구비해 두어야 마음이 놓인다.


달걀이 주재료인 음식은 일단 진입 장벽이 낮아서 좋다. 그야말로 만만해서 뭘 만들든 쉽고 금방 된다. 찬이 변변찮을 땐 프라이 하나 해서 고추장이나 간장 넣고 참기름 싹 둘러 비비면 꿀맛이고, 국물 생각이 간절할 땐 끓는 멸치 다시물에 살살 풀어 슴슴하게 소금 간 해 후루룩 마시면 속이 뜨끈하다. 바쁜 아침, 가족들 뭐라도 먹여 보내야지 싶을 땐 들기름에 파 달달 볶다가 계란물로 스크램블드에그 만들어 프라이팬 한쪽에 간장을 쪼록 따라 밥을 넣고 한데 볶으면 고소함 폭발이다.


점심으로 달걀찜을 했다. 혼자 먹을 거라 달걀은 두 개만. 뚝배기에 달걀을 풀고, 소금과 후추 간을 하고, 우유를 조금 따르고, 냉동해 둔 대파를 좀 넣고 휘휘 저어 가스 불에 올렸다. 나무 수저로 계속 저으니 둘레가 주름 모양을 하고 응고되기 시작했다. 바로 뚜껑을 닫고 약불로 내렸다. 4분쯤 더 끓게 두었다 불을 껐다. 희미한 탄내와 달걀찜 특유의 노린내가 부엌에 가득 찼다.


장사가 아무리 바빠도 엄마는 매일 저녁 빠지지 않고 달걀찜을 밥상에 올렸다. 언제부턴가 달걀찜을 내가 만들기 시작했다. 스텐 밥사발에 계란물을 넣고 소금, 후추를 치고 고춧가루, 깨, 대파를 뿌려 작은 냄비에 넣고 사발 뚜껑을 덮어 중탕을 했다. 익었나 안 익었나 뚜껑을 옆으로 젖히면 스르륵 미끄럼을 타 물속에 빠졌다. 앗 뜨, 앗 뜨. 겨우 잡고 뚜껑을 다시 덮어 익히느라 살짝살짝 데던 엄지와 검지 손가락.


달걀찜 한 숟가락 떠서 밥 위에 올려 후후 불어 먹으면 마음이 풀어졌다. 뜨거운 밥사발 안에서 부드럽고 따뜻하게 찰랑이는 달걀은 어른 같았다. 뜨거운 김은 날려 보내고 밥사발에 둥그렇게 자신을 가두어 굳은 달걀은 어린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닥이 얇은 갈색 층으로 눌어 버린 밥사발은 더 어른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배고파요. 오늘 저녁은 뭐예요?

나는 어김없이 냉장고 저 안쪽에서 달걀을 꺼낸다. 냉동 파를 꺼내고, 치즈를 꺼내고, 우유를 꺼낸다. 겉바속촉 치즈달걀말이, 오늘은 너로 정했다! 밖에서 하루 종일 고생했을 가족들에게 이만한 음식이 없으니.


작지만 두 몫, 세 몫을 하는 달걀. 단연컨대 달걀은 최고의 식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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