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던 책의 제목을 보고 언니가 말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졌다. 매번 이렇다. 언니는 무심히 말을 던지고 나는 정신을 차린다. 선문답 같은 대화에서 종종 깊은 파문이 인다.
앞으로 주어질 일들소화 못 해 민폐 끼침 어쩌나 걱정할 땐못해도 돼.물음표뿐인 삶에 아무것도 그리지 못할 땐 너도 학위 받고지방부터 강의 돌게 되면 알게 돼. 쉽지 않은 공부에 기죽어 있을 땐 잘할 수 있어.
언니는 유약한 나를 늘 말로써 미래에 데려다 놓았다.
그런 언니의 말을 듣고 있으면 용기가 났다.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 내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언니는 집 리모델링을 앞두고 짐정리를했다. 안 보는 책을 묶어 놓았다며 필요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 어휘론, 방언론 분야의 각종 전공서와 여러 권의 언어학 원서들 중에서 관심 있는 것들만 쏙쏙 뺐다. 그러는 사이 언니는 끈을 풀고 달라진 높이에 맞게 끈을새로 바짝 맸다. 조금도 성가신 내색 없이 뭐가 더 유익할지 옆에서 열심히 봐주었다.
언니는 박사 과정 때 나를 많이 챙겨 줬다. 먹을 것을 주로 사 줬다. 혜화역 2번 출구 앞 미스터 피자에서는 포테이토피자를. 떼르드 글라스에서는 키위아이스크림을. 아이스베리에서는 딸기빙수를. 페르시안 궁전에서는 양고기카레를. 서울대병원 근처의 이끼에서는 돈가스를. 버거킹에서는 와퍼 세트를.
언니가 학위를 하고 터키에 한국어 교수로 1년 남짓 나가 있을 때 조금 외로웠다. 언니와 걷던 대학로가, 성대 대성로가 쓸쓸했다.
언니의 명쾌한 한마디가 좋다. 뎅! 산사에 울리는 풍경 소리처럼 이따금씩 나를 깨운다. 그러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