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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Dec 21. 2023

퇴직 연금을 해지했다

  보험사 앱에서 퇴직 연금 해지 신청을 했다. 애걔걔! 기타 소득세 16.5%로 근 500만 원을 떼니 이 돈으로 뭘 하지 싶다. 4인 가족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에도, 차를 바꾸기에도, 리모델링을 하기에도 한참 모자란 금액. 나 혼자 '꿀꺽' 할 배짱이 없다. 괜히 혼자 먹다 체하기나 하지 뭐. 바야흐로 전대미문 불경기. 털어서 1년짜리 정기 예금으로나 묶자가 잠정 결론이다.


  만기 후 통장에 찍히는 돈은 허수 같다. 현실감 제로다. 공(0)이 몇 개지? 음 쫌 되네. 그게 다다. 자연히 손에 쥐는 돈은 단 몇만 원의 우수리 정도. 그나마도 외식을 하고 나면 먼지만 풀풀. 그럼에도 돈을 모으지 않으면 불안하다. 언제 아플지 모르기에, 어떤 일이 어떻게 생길지 모르기에. 두 발은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데 돈은 언제나 미래에 묶여 있다. 


기왕 미래를 현재로 당겨 오는 일이 생긴다면
나쁜 일이 아닌 좋은 일 때문이길 바랄 뿐.

  백화점에 갈 때마다 딸애가 물었다. 엄마는 왜 쇼핑을 하지 않느냐고, 물건 사는 게 싫으냐고 꽤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쇼핑의 즐거움을 모르고 자라서 그래." 하면 아이는 온몸으로 안타까워했다. 분명 맘에 드는 눈치인데 선뜻 들지 못하는 것을 딸애는 귀신같이 알아봤다. 비슷한 거 있잖아, 아직 쓸 만하잖아, 꼭 필요한 거 아니잖아. 잖아, 잖아, 잖아! 수많은 잖아들 속에서 물건으로부터 시선을 황급히 거뒀다. 옛날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퇴직 연금 해지 신청을 하고 나니 비로소 미뤄 놨던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올 한 해 내게 가장 큰 사건이었던 '퇴사'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 느낌.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1년쯤은 일 안 해도 될 것 같은 느낌.(그렇다고 일 안 할 내가 아니지만.)


  까짓것!
몇만 원 말고 몇십만 원 우수리 콜!
삐뚤어질 테다!
(그래도 되지, 남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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