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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Jan 17. 2024

그 많던 식당은 다 어디로 갔을까

  11시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앞도 안 보이게 내렸다. 받쳐 든 우산 때문에 시야가 더 좁아졌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눈이 우산에 떨어질 때마다 모닥불 타는 소리가 났다. 길에 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후루룩. 우와 맛있어요 엄마! 아들애가 크림스파게티를 한 입 먹고 눈이 똥그래져서 말했다. 와! 피자가 페이스트리 같아요. 아까보다 눈이 더 똥그래졌다. 많이 먹어. 모자랄까 봐 면도 추가했어. 눈발은 점점 더 굵어졌고 식당엔 아이와 나 둘뿐이었다. 이 얼마 만에 밖에서 둘이 먹는 점심인가. 스파게티를 이따금씩 덜어 주었다.


  오늘까지 유효한 커피 쿠폰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다 골목의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앗! 이 익숙한 상호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는데 손이 미끄러졌다. 아들! 사진 좀 찍어 줘. 건네받은 휴대폰에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늘여 사진을 확대했다. 가게 앞에는 붉은 글씨의 '짱구식당', '짱구분식'이 반쯤 지워진 철가방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출입문에는 '배달 전문'이 작게 쓰여 있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주인 얼굴이나 테이블 개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사진을 전송하면 혹시 거기? 할 사람 몇이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편은 알려나. 끝내 전송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방화역 근처엔 식당이 적은 편이다. 인기 있는 곳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건물주가 올려 달라는 임대료를 맞출 수 없어서라고 식당 주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만두칼국수를 팔던 '명가칼국수'는 화곡동인가로 이사를 갔고, 낙지연포탕과 해물파전을 팔던 '낙지낙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소고기미역국을 사발로 팔던 '명가'는 육사시미와 구이류도 팔았지만 문구점이 되었다가 GS25가 되었다. 사이 좋은 부부가 하던 '까치분식'은 어느 날 문을 닫았고, 건너편에서 각종 찌개와 청국장을 팔던 '짱구식당'도 사라졌다. 일본식 돈가스를 팔던 '메차쿠차'와 알밥과 반우동을 팔던 '우에노'가 없어져 너무나 아쉬웠고, 만삭의 몸으로 혼자 캘리포니아롤을 만들어 2층 나무 계단을 올라 음식을 날라 주던 '학교종이 땡땡땡'은 메뉴를 통일하지 않으면 미안했다. 생선구이와 아귀찜을 팔던 '기찬성'은 보쌈을 파는 '보족애'가 되었다가 월남쌈과 샤부샤부를 파는 '쌈촌'이 되었다가 지금은 스터디 카페가 되었다. 복지리와 대구탕을 깔끔하게 끓이던 '바다선생'과 우직하게 순두부찌개만으로 승부를 걸던 '개화순두부'는 20년이 지나 문을 닫았다. 원의 구내식당은 저렴했지만 거의 매일 밖으로 나오시피했다. 같이 밥을 먹던 이들과는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세월이란 무릇 그런 것,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스물다섯에서 삼십대 초반까지 방화역 일대의 식당이란 식당은 다 다녔다. 그때는 커피숍이 거의 없었다. '카페베네'와 '던킨', '스테프핫도그'가 다였다. 지금은 카페가 한 집 건너 한 집이다. 2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식당으로는 '행복한 돈가스', '문가네 칼국수', '고향집', '능마루'  정도다. 스파돈스와 바지락칼국수를 수없이 먹었다. 경신 샘이 문칼을 좋아해서 칼제비와 비빔밥을 먹으러 일주일에 두 번은 갔다.


  밥 한번 먹자로 시작해 정말 밥 한 번 먹는 것으로 끝난 사람도 있고, 밥 한번 먹자로 시작해 20년이 넘게 밥 약속을 잡는 사람도 있다. 그 많던 식당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듯 가까이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도 지금은 곁에 없거나 멀리 있거나 소식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같은 시간대를 보낸 사람들에겐 말로 다 못 할 애틋함 같은 게 있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뭔가와 마주치면 그때로 온전히 타임 슬립 되어 그들이 몹시 그리우니. 가끔은 그들도 그럴지.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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