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밥을 먼저 먹고 소파에 앉아 기대 있는데 큰애가 말했다. 엄마, 살짝 우울증 같아. 무슨 일 있어요?
아들애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이 기분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마주하기 싫었을까. 2월 26일. 새 프로젝트에 필요한 서류를 내러 학교에 간 그날 이후 조금씩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오후 1시 40분쯤 신촌역에 내렸을 때 사람이 평소보다 많다고 생각했다. 신촌로를 지나는데 곳곳에 꽃다발이 즐비했다. 그날 학위 수여식이 있었다.
교정은 사회로 새출발하는 졸업생과 그들을 축하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자의 술 색깔이 대부분 검은색이었지만 드문드문 노란색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학위를 받기까지 몇 년을 애썼을 주인공들의 얼굴은 구김살 없이 밝았다. 회의가 끝나고 정문을 향해 나오는데 이전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힘찬 구호를 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하기도 했다. 온통 축제인 속에서 터벅터벅 인파를 피해 걸었다. 생각에 날개가 돋쳤다. 내후년엔 나도였다가 가능은 하겠니였다가 아는 건 있니였다가 공부는 했니였다가 급기야 너 왜 입학했니까지 갔다.
사실은 그날이 졸업식이더라고. 금요일이나 돼서 무심한 듯 말하는데 남편이 그래서 표정이 어두웠구나 했다. 근데 이제 괜찮아. 할 수 있어. 나도 2년 후엔 엄마, 아버지, 아버님, 어머니, 애들 다 같이 언더우드뜰에서 사진 찍을 건데 뭐. 기다리는 김에 강의 뛸 때까지 3년만 더 기다려 줘 남편. 암요 암요. 기다리고 말고요. 우리 색시가 나 전업 주부 만들어 준뎄는걸. 얼마든지. 돈 안 벌어도 되니까 공부만 해. 소논문, 중논문, 대논문 오케이? 그래서 주제는요? 남편과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가볍게 털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요약해야 할 논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매일같이 통장의 잔고를 확인했다. 프로젝트는 언제 어디에 투입될지 알 수 없었고 불안과 회피와 권태와 지리멸렬 사이를 수천 번 왔다 갔다 했다. 그러는 사이 푸시하는 선배들을 만났고 안부를 물어 온 샘들을 만나 술을 한잔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애들 개학이었고 어어어어 하다 보니 3월 중순이었다. 책 속으로 도망을 쳤고, 글쓰기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쓰는 근육을 만드는 중이라고 제멋대로 합리화를 했다.
그러면서도 언제까지 이럴 순 없다는 마음이 커졌다. 주기적으로 연구실에 나가고 오프라인 스터디도 참석하는 등 최대한 집과 분리된 환경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다. 머리를 산뜻하게 자르고 동네 도서관이라도 9 to 6. 출퇴근하듯이 다녀 보자 했다. 하지만 지속되지 않았다. 탄성 잃은 고무줄이 허공에서 출렁거렸다. 다이어리의 날짜별 to do list에 X 표가 수두룩이 늘어났다. 한숨이 숨처럼 쉬어졌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할 때마다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다. 잘 다녀와. 말하는 동시에 마음이 늘어졌다. 이 주 화요일엔 학교에 다녀왔고 생일이었지만 내려간 기분이 올라오지 않았다. 먼지 쌓인 연구실 책상을 물티슈로 네 번 닦았고 유통 기한이 지난 컵라면과 커피와 차와 비스킷을 비닐봉지에 싸서 휴지통에 버렸다. 책상 위에 놓인 백팩이 너무 내 것 같지 않았고 전철 안에선 노트북과 전공서로 여러 번 휘청거렸다. 학기 초 캠퍼스는 과잠을 입은 학생들로 넘쳤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느낌에 마음은 물먹은 솜이었다. 울려 대는 카톡을 오래도록 확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