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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Apr 05. 2024

누가 밖에 피아노를 내놨다

  우리 아파트 지상 주차장 한편엔 구청 수거용 물품을 가져다 놓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불, 인형, 의자, 가전, 소파, 매트리스 등의 생활 폐기물이 주를 이룬다. 대개 그것들엔 노란 사각 스티거가 붙거나, 필요한 분은 가져가도 되니 이틀 정도 기다렸다 아무도 안 가져가면 그때 스티커를 붙이겠다는 쪽지가 물품들에 붙어 있다.



  작은애를 데리러 가려고 중앙 현관을 나서는데 와인색 피아노가 그 자리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바퀴 달린 왼쪽 지지대가 살짝 까인 것 빼곤 외관상 멀쩡했다. 뚜껑을 열고 도레미파솔라시도 흰 건반을 눌렀다. 음 조율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소리가 깨끗했다. 위로 접혀 올려진 좁고 길쭉한 악보대 아래로 YOUNG CHANG이 금박으로 쓰여 있었다. 그 즉시 광고 시엠송이 입가에 맴돌았다.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영창피아노.
맑은 소리 띵띵띵띵. 고운 소리 띵띵띵띵.
영창피아노 영창.


 그러면서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내려왔을까가 첫 번째. 아무 스티거도 쪽지도 없는데 버리는 게 맞긴 맞는 걸까가 두 번째. 괜히 가져갔다 도둑 되는 거 아닌가가 세 번째. 어떻게 옮기지가 네 번째. 저녁까지 이 자리에 있을까가 다섯 번째. 거실에 놓을 데는 있나가 여섯 번째. 가 지금 피아노 칠 때냐가 일곱 번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누가 밖에 피아노 내놨어.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 우왕. 그게 다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남편이 내게 전화를 했다. 집에 있는 키보드 건반부터 치셈. 흥칫뿡. 그냥 그렇다고! 전화를 끊었다. 아파트 단지를 들어설 때쯤 누가 피아노를 버리려는지 밖에 내놨다고 딸애에게 말했다. 작은애는 어디 어디? 하면서 폐기물을 내다 놓는 그 자리로 달려갔다. 우와~ 누가 피아노를 다 버렸데? 뚜껑을 열고 띵똥거렸다. 엄마 이거 갖고 싶지. 나랑 들까. 아니. 무거워서 못 들어. 그리고 아빠가 안 된데. 왜. 거실에 안 쓰는 물건들 버리면 자리 나올 텐데. 엄마 치고 싶잖아. 층간 소음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좀. 에고 엄마 속상하구나. 표정이 딱 가져가고 싶구만.


  퇴근 후 남편이 주차장에서 피아노를 보고 말했다. 이거구나. 와 진짜 멀쩡하다. 그르니까. 멀쩡하지. 중고로 팔아도 될 텐데 왜 내놨을까. 뭔가 사연이 있거나 문제가 있으니까 버렸겠지. 그냥 가자. 힝. 그럼 새걸로 사 줘요. 저기요? 집에 있는 전자 키보드 피시랑 연결해서 체르니 5억 번까지 치면 그때 생각해 볼게. 흥! 체르니는 5억 번까지 없거든요? 흥! 그건 나도 알거든요? 그렇게 없던 일이 됐다.


  작은애가 수학 과외를 간 동안 남편과 근린공원으로 벚꽃놀이 겸 산책을 다녀왔다. 작은애가 말했다. 엄마 있지. 그 피아노. 가져가지 말라고 누가 그새 종이 붙였던데? 그래? 아빠랑 들어올 때 아무것도 못 봤는데? 그래? 응. 맘에 드는 사람이 자기가 가져가려고 일부러 찜콩한 건가. 아님 진짜 주인이 중고로 팔려고 무거워서 밖으로 내놓은 건가. 그랬음 진즉에 쪽지를 붙이지 않았을까. 딸애와 나름의 추리를 했지만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지만 피아노를 버리려고 내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다. 1988년 당시 일반인 한 달 월급은 70~80만 원. 영창 피아노 가격은 160~180만 원. 집이 어려워지거나 이사 갈 집에 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으면 중고로 팔아도 반값 이상은 챙길 수 있었다. 그런 시대를 지나온 나로서는 피아노가 밖에 나와 있다는 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이던 1989년. 아버지는 한일피아노를 태일이 삼촌 누나에게서 70만 원을 주고 중고로 샀다. 1998년 대학 입학을 앞둔 2월, 전자 앞 안채에 불이 났고 한 푼이 아쉽던 그때 피아노는 또다시 누군가에게로 팔려 나갔다. 십여 년이 넘게 먼지만 덮어쓰는 피아노는 자리만 차지했다. 팔아도 되냐고 아버지는 내게 정말로 미안해하며 수차례 물어보셨다. 이제 치지도 않는데요 뭐. 다 까먹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랬었으면서 밖에 나온 피아노 앞에선 왜 그렇게 마음이 흔들렸던 건지. 피아노는 내게 여러 의미였음을 버려진 피아노로 안 하루였다.


ps. 오늘 오후 결국 그 피아노엔 노란 스티커가 붙었다. 오가는 주민들이 한 번씩 뚜껑을 열고 짧게 한 곡씩 친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부터 내 또래의 부부까지. 피아노는 월요일쯤 구청에서 수거해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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