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금 여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슴푸레 May 15. 2024

부처님 오신 날, 약사사

  6년 만에 절밥을 먹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간단히 화장을 하고 남편과 큰애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 집을 나서자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받쳐 들고 개화산 둘레길을 올랐다. 절 중턱에 두 다리를 잃은 남성이 원통형 고무를 다리에 끼운 채 흙길에 엎드려 있었다. 남성의 앞으로 네모나고 까만 스피커가 놓여 있었고 스피커에서 구슬픈 노래가 흘러나왔다. 스피커 위쪽엔 동전과 지폐 몇 장이 담긴 하늘색 사각 플라스틱통이 올려져 있었지만 그 남성을 위해 돈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어릴 때 영동시장에서 심심찮게 보았던, 두 팔을 당겨 앞으로 기는, 다리 잃은 남성이 떠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절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절에 들어서면서 합장을 하고 반배를 했다. 부처님 머리에 물을 부어 목욕을 시키려는 사람들과 부처님께 장미꽃을 바치려는 사람들로 벌써 긴 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왼쪽에선 초와 염주를 사고파는 이들로 북적였고 옆으로 커피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입구의 오른쪽으론 팝콘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성큼성큼. 개화산방으로 들어갔으나 몇몇이 떡과 비빔밥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약사사 3층 석탑 앞쪽에 조성된 간이 무대 옆으로 여러 모양의 등이 비를 대비에 비닐에 싸인 채 세워져 있었다. 흰 저고리에 청록색 치마를 입은 합창단원들이 무리를 지어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관객석을 지나쳐 종무소가 있는 쪽으로 가자 '공양하는 곳'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여보! 저기 밥 먹는 덴가 봐. 천막 아래로 돗자리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끝난 건가 하는 사이. '배식'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여보, 여기!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보살님들이 백설기와 비빔밥과 미역냉국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받아서 복도를 통과해 반대쪽 계단을 올라 다시 개화산방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밥이 차가웠지만 국물을 조금 부어 조심조심 비볐다. 건강한 맛이 입가득 퍼졌다.


  남편이 커피 한 잔을 받아 왔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핸드백을 남편에게 건넸다. 나 108배 올리고 올게. 20분 넘게 걸릴 거야. 대웅전에 들어가 방석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외투를 벗고 복전함에 돈을 넣고 삼배를 올리고 108배를 시작했다. 빽빽한 사람들로 소란스러웠고 이따금씩 절을 하는 사람들과 몸이 부딪혔다. 한 사람에 10번씩 절을 올리며 기도를 했다. 눈가뜨거워졌다가 두 눈에서 빛이 깜빡깜빡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간절히 절을 올렸다.


  남편의 건강과 큰애의 바른 성장과 작은애의 원만한 학교생활과 아버님의 건강과 어머님의 건강과 아버지의 건강과 엄마의 건강과 오빠의 마음 편함과 새언니의 건강과 용기의 건강과 용기 처의 건강과 이모부의 극락왕생과 조찬용 선생님의 건강과 원준이의 건강과 현욱이의 건강과 주연이의 건강과 경신 샘의 건강과 현주 샘의 평안과 윤희 샘의 평안과 예원 샘의 건강과 상은 샘의 건강과 제현 샘의 건강과 윤기네의 건강. 그리고 끝으로 나의 마음 챙김을 위해 절을 올렸다.


  그 사이 주지 스님의 노래와, 신도들의 장기 자랑이 이어졌다.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절은 사람들로 활기찼고 가슴에 연꽃 배지를 단 사람들로 가득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정말로 오랜만에 부처님 오신 날 분위기 나는 하루였다.


#초파일#부처님오신날#단순히석가모니부처님이태어나신날이아닌삶이라는불길속에서가엾은중생을제도하기위해지혜와진리로부터오신감사의날#약사사#점심공양#절밥#비빔밥#미역냉국#백설기#108배#관세음보살#삼귀의#불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