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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Jun 04. 2024

뭘 해도 안되는 날

  오전부터 분주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아침을 준비해 먹이고 새 랩실에서 먹을 도시락을 만들었다. 설거지를 하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백팩에 텀블러와 도시락과 헤드셋과 문서철과 마스크를 넣고 집을 나섰다. 버스에서 내려 서대문 소방 지나 북문을 거슬러 올랐다. 날은 너무 맑았고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땀이 식었다.


  비밀번호를 눌러 랩실 문을 열고 불을 켜고 피시를 작동다. 시시티브이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고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텀블러를 꺼내 물을 마셨다. 집기들에서 나는 새 냄새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피시에서 파일을 열고 무선 헤드셋을 피시와 연결하는데 분째 기기 등록이 됐다. 작업 단톡방에 문의를 하일러 주는 대로 보았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침도 걸렀으니 이른 점심이나 먹자. 차가운 밥을 꼭꼭 씹어 넘겼으나 목이 메어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속이 더부룩했다. 겨우 욱여넣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 책꽂이에서 《형태》를 꺼내 관심 가는 논문을 읽었다. 졸음이 왔고 바람을 쐬러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남편과 통화를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다 없이 랩실로 들어다.


  조교 선생님들이 오는 네 시까지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보안 문제로 인터넷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같은 이유로 노트북 챙겨 오지 않았기에 이곳에선 뭘 할 수가 없었다. 위당관 연구실에 가서 다른 작업이라도 하다 올까. 유에스비를 가지고 가서 거기서라도 일을 하다 올까. 근무 시간을 기록한 이상 근무지 이탈은 문제가 될 터였다. 하.......


  음성 파일을 열었다. 첫 번째 파일부터 난리였다. 10~15초 이내로 분절화되어 있어야 할 첫 번째 문장이 4분을 넘어갔다. 이걸 다 언제 잘라. 마우스 휠을 튕기며 파일을 훑을수록 한숨이 나왔다. 빠진 마침표와 명백한 오탈자, 띄어쓰기 오류를 수정하고 있으니 하나둘 같이 작업을 할 팀원이 랩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몇몇 선생님들이 몇 시간의 나처럼 이렇게 저렇게 조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블루투스 헤드셋은 여전히 안 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파일들을 손질해 나갔다.


  4시가 되어 조교 선생님들이 도착했고 이런저런 시도 끝에 블루투스 헤드셋은 잡혔다. 네트워크가 불안정하니 피시는 계속 켜 놓으라고 했다. 4시 반쯤 헤드셋을 쓰고 4분짜리 음성을 10초 단위로 잘라 전사를 시작했다. 20분짜리 첫 번째 파일 1/5도 완료하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어느덧 6시가 가까웠다. 만원 지하철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작업 대장에 퇴근 시간을 쓰고 후문을 내려와 버스를 탔다. 예상대로 버스는 혼잡했고 앞문으로 내려야 했다. 동교동 삼거리에서 하차 후 공항철도 갈아탔다.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지만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 출판사 대표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중에 통화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열차 한 대를 보내고 백팩을 안고 겨우 올라탔다. 한 발이 반쯤 떠 있는 상태로 낑겨 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역마다 밀려드는 인파에 몸은 점점 기울어졌다.


  어디쯤이야? 남편의 카톡이 울렸다. 김포공항. 5호선 갈아타는 곳에서 만나. 응. 환승 구역은 인파로 엉켰다. 승강장에 도착해 가장 가까운 나무 벤치에 앉았다. 넋을 반쯤 놓고 있는데 남편이 일찍 왔네 했다. 머리가 너무 깨질 것 같아. 약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집에 가서 먹지 뭐. 콕콕콕콕 쑤시던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와, 우리 남편. 매일같이 이렇게 출퇴근하는 거야. 고생 많다. 응 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남편의 시간에, 경제력에 더부살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떨쳐지지 않았다.


  대표님과 통화를 하며 순댓국을 시켰다. 네. 네. 아....... 네. 네. 네. 심각한 표정의 나를 남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10분쯤 통화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책 배포. 또 밀릴 거 같아. 왜애? 하....... 머리가 더 아파 왔다. 더 좋은 책을 내기 위해서야와 그만하면 되지 않았어의 사이. 올라오는 화와 당혹감을 주저앉히느라 밥이 삼켜지지 않았다. 더 못 먹겠어. 남편이 계산을 고 큰애 먹을 밥을 따로 포장해 같이 집으로 왔다.


  유월. 해야 할 일들이 빠르게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대학원생#하루#소화불량#프로젝트#시간제출퇴근#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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