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준비를 하려고 거실에 나온 남편이 말했다. 오늘 날씨 너무 좋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제법 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서자 마음이 바빠졌다. 더 더워지기 전에 공원 몇 바퀴 돌고 장 보고 와서 일해야지. 저녁에 또 비가 퍼부으면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니.
백을 들고 버블베어에 갔다. 사장님이 반갑게 인사하며 잘 지냈냐고 물으셨다. 책 너무 예쁘더라며 손님에게 빌려줬는데 돌려 달라는 말을 매번 까먹어서 아직 못 읽으셨다고 했다. 그럼 한 권 더 드릴까요? 집에 아직 좀 있어서요. 사장님 성함 알려주시면, 제가 사인해서 이따 가져다 드릴게요. 씽긋 웃으며 아이스레몬티를 받았다. 들고 공원을 향해 걸었다.
오전 10시가 좀 못 된 시간, 공원엔 사람이 많았다. 그늘 벤치에 앉아 유모차를 마주 보이게 두고 스마트폰을 보는 아기 엄마와 옆 벤치에서 오늘 저녁엔 뭘 해 먹냐며 이야기를 나누는 초로의 아주머니와 저마다 운동 기구에 서서 돌리기, 당기기를 하느라 땀을 흘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창고 가서 물 마시고 일해야지. 초록색 빗자루를 든 중년 여성 둘이 지나갈 때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트럭 옆면에 '가로등 보수 공사'라는 플래카드가 펼쳐져 있었다. 삐삐삐삐삐-. 포클레인의 운행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거의 동시에 한 인부가 길쭉한 원통형의 가로등 헤드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밤새 비가 많이 오긴 많이 왔나 보다. 가로등의 전구가 나갈 만큼.
시선을 거두고 공원을 도는데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등 뒤로 회색 그림자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순식간이었고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 사진을 찍기도 전에 저만치 멀어졌다. 이 놀라운 광경을 찍어야 되는데, 기록해야 되는데.
하는 사이, 맞은편에서 조깅하는 남자가 느린 속도로 달려왔다. 와아아. 남자의 가슴으로 그림자가 또다시 쏟아졌다. 무더기의 나뭇잎 그림자가 티셔츠를 만나 우르르 쏟아졌다.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이 내 옆을 스쳐 걸었다. 은빛의 나뭇잎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등 뒤에 떨어졌다. 그림자가 빛을 만나 별처럼 부서졌다. 사람들이 나무 그늘을 지나칠 때마다 그늘 틈에서 딸깍. 슬라이드가 자동 상영되는 것 같았다. 꿈꾸나 싶게, 등과 가슴에 떨어지는 그림자 폭포는 강렬했다. 그늘을 지나쳐 온 내 등에도 몇 차례 풀잎 무더기 그림자가 와르르 쏟아졌을 거였다.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좁은 등에 뿌려지는 그림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대의 삶을 알고 있노라고. 그대의 애씀을 알고 있노라고. 그러니 지치지 말고 계속해서 걸으라고. 내가 그대의 등과 가슴을 스크린 삼아 이렇게 증명하겠다고. 그대는 이렇게 눈부신 사람이라고.
언덕을 지나 올라가는데 평소와 뭔가 달랐다. 어? 아!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가로등 보수 공사 중이라는 트럭이 떠올랐다. 아침에도 불을 켜고 있는 가로등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눈에 닿는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맴맴맴맴 매애애앰. 비가 그치니 매미가 나왔구나.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 생각하는 사이, 쌔애애애름 쌔애애애애름. 쓰름매미가 울었다. 덜그럭덜그럭 땅에 삽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고, 달그락달그락 오른손으로 움켜쥔 아이스레몬티에서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안 돼, 메모해야 돼. 집에 가면 다 까먹어. 벤치에 앉아 핸드폰 메모장 앱을 열었다. 여러 무리의 노인들이 물을 담았을 텀블러를 들고 모자를 쓰거나 양산을 쓴 채 느릿느릿 지나갔다. 그들의 발밑으로 세 살 꼬마의 몸 그림자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붙어 걸었다. 테니스장에서 자전거를 타던 중년 여성이 자전거를 세우고 옆 벤치에 앉았다. 짹짹짹 참새가 울자 휘릭휘릭휘릭 이름 모를 새가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로 울었다. 데워진 바람이 이따금씩 불었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