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까진 술을 많이 마셨다. 친구들, 대학 선후배들, 전 남친들, 직장 동료들. 열 번 만나면 아홉 번 술을 마셨다. 주종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가 좋아하는 술을 따라서 마셨다. 생맥주, 소주, 막걸리, 칵테일, 병맥주, 사케 정도를 왔다 갔다 했다. 여덟 살 많은 예비역 선배는 500CC 생맥주를 다 마시면 "사장님. 여기 조끼 하나 더 주세요." 했다.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조끼.최소 40대나 알 법한 말 조끼.
한창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앞이나 옆 사람의 잔이 빈 것을 발견하면 꼭 따라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랬다. 예의라 여겼을까.자작하지 않게 너도나도 잔을 채웠다. 그러다 보면 금방 술병이 비고. 한 잔이 아쉬워 한 병을 시키면 한 병이 두 병 되고. 두 병이 세 병 되어 날이 밝았다. 밤새 나눈 이야기를 머리에 다 담지 못해도 같은 시각 같은 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전우애 같은 감정이 싹텄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그때처럼 술자리를 즐기지 못하고 그렇게 술을 마시지도 못한다. 과음을 하면 다음 날 크게 고생을 한다. 체력을 비롯해 많은 것이 변했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30대 후반, 하이볼을 처음 알았다. 일본에 2년 동안 체류했던 직장 동료가 데리고 간 술집에서였다. 얼음이 반쯤 담긴 투명 잔에 레몬 슬라이스가 띄워진 모습은 보기에도 청량했다. 한 모금 들이켜니 시원, 상큼, 달콤, 씁쓸한 맛이 입안에 순식간에 퍼졌다.그 맛에 그 즉시 반했다. 자기가 마실 만큼만 시키고 더 이상 안 마시고 싶으면 그만 먹겠다고 해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자유로움이 무엇보다 좋았다.
퇴근하고 집에 온 남편과 동네 주점에서 요깃거리 겸 요리를시켜 하이볼을 마시고 돌아왔다. 많이 말고 딱 한 잔씩만. 이 기분 좋은 적당함! 앞으로도 하이볼을 쭉 좋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