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 록을 누르고 현관에 들어서자 큰애가 나와 양손에 들려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받아 식탁 의자에 옮겼다. 말도 안 했는데 기특하네 생각하고 신발을 벗었다. 실내화로 갈아신는데 꽉 움켜쥐는 듯한 위경련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엄마. 아까 할머니가 저녁밥 주고 가셨어요.
-그랬구나. 엄마 어디 갔냐고는 안 물으셨어?
-제가 먼저 말했어요. 상담 가셨다고요.
-별말씀 없으셨고?
-네. 하도 안 와서 보고 싶어서 오신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도 같이 오셨었어요.
-응. 알았어.
장 봐 온 것을 냉장고에 넣고 식탁 앞에 앉았다. 며느리가 좋아하는 오이나물과 가지나물. 아이들이 좋아하는 진미채와 제육볶음과 닭볶음탕. 막 해서 담았을 조밥. 씻어서 물기가 남아 있는 샤인 머스캣과 사과가 식탁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차례 눈물을 쏟고 왔는데 어머니의 음식 앞에서 또 한번 눈물이 터졌다. 쥐어짜는 듯한 위의 통증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지금 밥 먹을래요. 작은애에게 어머니가 주신 음식들로 상을 차려 방에 가져다 주고 소파에 앉았다.
-어머니, 저예요.
-그래. 집에 왔니?
-네. 아이코. 무슨 음식을 이리 정성스레 많이 해 주셨어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별말을 다 한다. 너 바쁜 거 같아서 편히 먹으라고.
-.......
-어서 밥 먹어라. 배고프겠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럼 들어가세요.
-그래. 쉬어라.
지난주 작은애의 종합심리검사가 있었다. 각종 검사를 아이가 3시간 반에 걸쳐 치르는 동안, 나와 남편은 주 양육자 기질 검사와 문장 완성 검사, 아이의 양육 태도 검사 등 여섯 종의 심리 검사지에 0~5점까지 항목마다 체크를 했다. 오늘 3시. 그 결과를 들으러 가야 했다.
풀지 못한 숙제를 다시 마주한 기분이었다. 2년 전 아이의 첫 상담 때 들었던 말을 똑같이 들었다. 나의 상담 시간이 아니었기에 내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이 내 눈의 미세한 표정을 부지런히 좇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다 눈물이 왈칵 터졌다.
-어머니. 토요일인데 오랜 시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근처 카페에서 달달한 케이크랑 차 드시고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아요.
-네. 그러려고 집에서 나올 때 읽을 책 챙겨 왔어요.
-드린 결과지는 너무 자세히 읽지 마세요. 그냥 참고 정도만 하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상담소를 나와 걷는데 바람이 차가웠다. 책이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혼자 걸어 보려다 카페로 들어갔다. 차를 시키고 결과지를 읽었다. 반을 접어 가방에 넣고 책을 꺼냈다. 마침표로 끝난 첫 번째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눈이 옮겨지지 않았다. 한 시간쯤 앉아 있다 장을 보러 나왔다. 어둑어둑. 어느 새 여섯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몇몇 사람의 얼굴이 스쳤다. 주말 저녁이야. 약속이 있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야. 갑자기 안부 전화 하면 얼마나 뜬금없겠어. 마음을 고쳐먹고 시장 방향으로 걸었다.
삑삑삑삑 삑삑삑삑.
내내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외면했던 마음이 어머니의 음식 앞에서 터졌다. 우리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닭볶음탕과 제육볶음과 진미채와 오이나물과 가지나물과 조밥과 샤인 머스캣과 사과로 접시와 반찬 통에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