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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은 배운 적이 없어서

by 어슴푸레

12월 2일.


전일 대비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져 서울에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딸애는 일본어 수업이 끝나자 점심도 마다하고 고양이부터 보러 가자고 팔짱을 끼며 성화를 부렸다.


-애기야.

-.......

-애기야 어딨어. 언니 왔어.

-에오옹. 에오옹.


가늘고 긴 울음소리가 들렸다. 풀숲에서 검은 코리안 숏 헤어가 나와 쭈그려 앉은 딸 뒤를 한 바퀴 돌고 허벅지에 몸을 기댔다. 이윽고 아이가 벤치에 앉자 가볍게 톡 뛰어올라 딸애 무릎에 들어갔다.


-에오옹. 에오옹.

-엄마. 애기 목소리가 이상해요. 추워서 감기 걸렸나 봐. 불쌍해서 어떡해.


고양이가 힘없이 딸의 손가락을 핥자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엄마. 화내지 말고 들어요. 애기 우리 집에 데려가면 안 돼요? 내일은 영하 8도라는데 얼어죽음 어떡해요. 이삼 일 데리고 있다 날 따뜻해지면 보호소에 데려다줘요. 제가 잘 돌볼게요. 추운 곳에 혼자 두고 가기 미안해서 그래요. 엄마 제발요.

-안 되는 거 알잖아. 그럴 수 없어.

-아빠한테 전화해서 허락받을게요.

-길고양이 키우는 거 아빠가 안 된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

-키우는 거 아니고 며칠만 데리고 있자는 거잖아요. 제가 목욕시키고 다 할게요. 엄마 제발.


아이는 녹색 플라스틱 그네에 앉아 남편에게 전화했고 울음 섞인 음성으로 애원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제발요. 통화 시간은 15분이 넘어갔고 고양이가 놀이터 땅바닥에서 그런 딸을 힐끔거렸다. 나는 딸에게 눈짓을 하며 전화 끊으라는 동작을 취했고 엄마는 가만 좀 있어요 소리를 빽 지르는 아이와 계속 있다가는 감정이 격해질 것 같아 조용히 말했다.


-엄마 집에 갈 거야. 그만하고 가자.

갈 마음이 없는 듯 통화에 점점 열을 올리기에 발걸음을 빨리 해 놀이터를 벗어났다.


도서관에서 책을 반납하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허락해 줄 때까지 집에 안 가겠다는데 당신이 가 봐야지 않을까.

-지금 가면 싸우기나 하지. 가서도 안 굽힐 거야.

-그렇긴 한데 날이 추워서. 감기 걸리면 어떡해. 옷 따뜻이 입었어?

-어. 추우면 집에 올 거야.

-별일없겠지?

-그래야지.

-앱으로 동선 계속 체크할 테니까 너무 늦게까지 있음 당신이 좀 데리고 와 줘.

-응.


집에 돌아와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자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진동이 울렸다.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카톡을 열어 메시지를 입력했다. 전화하지 말고 집으로 오면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삑삑삑삑 삑삑삑삑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내 팔을 확 잡아 끌었다.


- 놔. 이따 얘기하자.

-엄마는 정말. 나한테 미안한 거 하나도 없어요?

-내가 뭘. 싸울까 봐 온 거잖아. 가자고 했는데 버틴 건 너잖아.

-그래도 그렇게 버리고 오는 게 어딨어요? 얼마나 추웠는데. 걱정도 안 돼요? 엄마 올 줄 알고 계속 기다렸단 말이에요.

-.......

-미안하다, 추웠겠다, 와 줘서 고맙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다정하게 말해 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아빠는 안 그래. 엄마 진짜 미워.

-그래 미안하다.

-그게 사과예요? 하. 진짜. 엄마. 나 사랑하긴 해? 전혀 아닌 거 같아. 이래도 돼 나한테?엄마 맞아?

-그만하자. 엄마가 네 맘 몰라준 거 미안해.

-아아악. 아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품에 안겨 딸은 한참을 울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묫한 따뜻한 말 한마디. 미안하다는 사과. 힘들었겠다는 공감. 경험하지 못하고 큰 나는 같은 지점에서 매번 돌부리에 걸리듯 넘어진다. 사랑을 갈구하는 딸에게 한 번도 넘치는 사랑을 주지 못할 때마다 아이에게서 어린 나를 본다.


다정함은 배운 적이 없어서. 그토록 엄마의 사랑에 갈급해하는 너를 한없이 목마르게만 한다.


다정함은 노력한다고 길러지는 게 아니구나. 뼈아픈 자각과. 그래 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지. 호흡처럼 익숙한 자기환멸과. 아니야. 할 수 있어. 난 기어이 다정한 부모가 될 거야. 바늘 1000개쯤 꽂은 가슴으로 뜨겁게 우는.


어찌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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