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남편과 큰애가 집을 나서자 두부된장국에 밥을 말아 먹고 작은애를 깨웠다.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 돈 빨래를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커피를 마시고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말리고 있는데 작은애가 두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와 일어났어요 하고 물을 마셨다. 엄마 절에 갔다 올게. 식탁의 유부초밥 챙겨 먹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빠앙. 길고 긴 경적이 울림과 동시에 약사사 앞 좁은 회색 콘크리트 비탈을 두고 나가려는 승용차와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SUV가 대치했다. 저러다 싸움 나지 싶어 발걸음을 빨리해 경내에 들어섰다. 몸을 숙여 세 번 합장을 했다. 동지 법회로 3층 석탑에서부터 스님의 목탁 소리, 불경 외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삼성각 옆으로 길게 늘어선 줄은 팥죽과 동치미 그릇을 손에 쥐고 들고 나는 사람들로 혼잡했다. 반투명 봉지에 든 팥떡 한 덩이와 찹쌀이 어우러진 팥죽, 흰 무와 오이장아찌가 가득한 플라스틱 용기를 받아서 줄 옆의 파란 천막에 들어가 한 술 떴다. 이거 먹으려고 1시간 올라왔지 뭐야. 설탕 좀 넣지 너무 밍밍하다. 간을 안 해서 뭔 맛인지 모르겠다. 다 식었다. 앞에 앉은 네댓 명의 일행이 나를 보며 맛있어요? 더 먹을래요? 했다. 먹을 만해요. 괜찮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숟가락질을 끝냈다.
신을 벗고 법당에 들어가 기다란 회색 방석과 까만 가죽에 금색 글자가 박힌 법요집을 챙겨 자리를 잡았다. 복전함에 지폐를 넣고 1배. 2배. 3배. 4배...... 16배를 하는데 이로써 예불을 마친다는 스님의 말씀이 들렸다. 불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틈에 짐을 챙겨 관세음보살상 앞에 방석을 내려놓고 다시 3배를 올렸다. 양반다리를 하고 눈을 감자, 등 뒤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 행자들이 법구를 들고 나가는 소리, 떠드는 소리가 한차례 휘몰아치다 잠잠해졌다. 관세음보살. 들숨. 관세음보살. 날숨. 관세음보살. 들숨. 관세음보살. 날숨. 명호를 부르며 깊고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자 눈가가 뜨거워졌다. 양쪽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뚝뚝뚝뚝. 턱 밑으로 떨어져 허벅지가 축축했다.
유독 힘들었던 2025년이 한 페이지씩 넘어갔다. 아이가 자퇴를 말하던 중학교 입학식 날부터 매일매일이 전쟁이었으나 사방은 꽃이 만발했던 봄. 대안 교육 위탁 기관에서 수탁 해지 통보서를 쓰고 버스 타고 집에 오던 날. 돌아가셨다는 조찬용 선생님의 부고 문자를 받고 황망히 앉아 있던 오월의 일요일 아침과 모든 프로젝트가 끝나면 이듬해 1월에 숨을 끊어야겠다 모질게 마음 먹던 차가운 밤. 남겨질 남편과 두 아이 생각에 차라리 암에 걸려 죽었으면 좋겠다고 온갖 나쁜 생각들로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던 밤. 집 앞 공원 벤치에서 남편 품에 안겨 통곡하던 유월의 밤. 미인정 유예 위원회에 참석해 최종 의사 표현을 하고 아이와 학교 밖으로 나오던 칠월의 낮. 꾸역꾸역 멘털을 잡고 밤을 새워 가며 2, 3일 날짜를 넘겨 마감하던 날. 잦은 몸싸움과 가시 돋친 말로 만신창이가 되고 자기 파괴적인 아이의 자해 앞에서 와르르 무너져내리던 날. 법문을 듣고 108배를 하고 울고 울고 울던 날. 영성가들의 책을 읽고 노트에 날것의 이야기를 적고 봉인된 트라우마를 만나 목이 아프게 울던 날.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부처님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뺨에 흐르는 눈물이 식으면서 한기가 돌았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하............ 하......... 끅끅거리는 울음을 삼키며 콧물을 훌쩍였다.
산을 내려와 정돈된 마음으로 작은애를 대했다. 오후 3시 반. 4시 상담을 앞두고 갑작스레 아이는 잠이 들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아도 일으켜 세워도 요지부동이었다. 안 갈 거야. 졸려. 완강한 태도에 마음에 폭풍이 일었다. 참아야 돼. 참아. 참아. 속으로 되뇌었지만 끝내 물거품이 되었다. 급히 상담 선생님께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문자를 보냈다. 아이와 말다툼을 하다 밖으로 나왔다. 가슴속에 불지옥이 활활 타올랐다.
-어머니라도 오시겠어요?
-네. 가겠습니다.
-사실은 몇 달 전부터 어머님을 따로 뵙고 싶었어요.
-어머니 너무 지쳐 보이세요.
-알맹이가 텅 빈 거죽처럼요.
-약을 드시는 게 어떻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요. 그 정도로 심각해 보이세요.
-.......
-힘드시지요. 어떻게 안 힘드실 수가 있어요. 지금껏 잘해 오셨어요.
후드득후드득. 후드득후드득. 손쓸 새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정신이 멀어져 갔다.
-정말이지. 오늘만큼은 화내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나 기도를 하고 왔는데요. 얼마나 참회를 하고 왔는데요.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리면 저는 제가 쓰레기 같아요. 저를 견딜 수가 없어요.
-말 안 들으면 패 죽인다는 말을 밥 먹듯 하며 키운 내 부모와 결국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거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요.
동짓날. 한 해의 기운이 바뀌는 날. 양의 기운이 점점 세지기 시작하는 날. 그리하여 이 기나긴 어둠이 영영 끝이길 바라며 기도를 올리고 또 올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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