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가을. 대학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조찬용 선생님께서 축하주를 사 주셨다. 수원역의 한 대폿집에서였다. 예정에 없이 선생님께서는 같이 시 쓰는 동생이야. 백 원짜리밖에 안 돼서 이름이 백원이야. 성백원. 하시며 비슷한 연배의 한 남성을 소개했다. 선생님께서는 7학기 학점과 평점이 적혀 있는 성적 증명서를 오래도록 보시고 말했다. 참 잘했다 우리 선영이. 서너 시간쯤 막걸리를 마셨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그만 취해 버렸다. 안녕히 가세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두 분께 인사를 하고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휴대폰을 열어 윤기에게 전화했다. 미안한데, 나 좀 데리러와 줄 수 있어? 너무 취해서. 택시비도 없고. 30분쯤 지났을까 까무룩 의식이 흐린데 윤기가 내 오른팔을 잡고 부축하는 게 느껴졌다. 발이 꼬이고 넘어지기를 여러 차례. 도저히 같이 버스를 탈 수 없다고 판단한 윤기는 집에 전화해서 차로 데리러오시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냐 갈 수 있어. 몇 번을 우기다 항복했다. 그야말로 만취 상태였다.
-윤기야. 선영이 무슨 일 있다니? 저렇게 몸도 못 가누고 술 마신 거 처음 본다. 아는 거 있음 말해 줘라.
-아뇨 어머니. 저도 아는 게 없어요.
-자식 겉 낳지 속은 못 낳는다더니. 쟤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통 말을 해야 말이지.
자정이 다 된 시각.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고 계셨고. 엄마는 쟤가 왜 저런다니. 반복 재생되는 카세트테이프처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뒷좌석 윤기 무릎에서 나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집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필름이 끊겼다.
그날 이후 가끔씩 그 말이 생각났다. 자식 겉 낳지 속은 못 낳는다는. 부모 자식 사이여도 우리는 완벽한 타인. 입을 닫고 마음을 닫아 버린, 중 2 기말고사 기간이 뒤따라 떠올랐다. 총알처럼 퍼부어지는 폭언과 저주에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여중생까지. 그날도 나는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만 볼 수 있을까. 윤기를 만나 아파트 단지의 공원 벤치에서 펑펑 울었다. 죽고 싶어.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윤기는 토요일.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기 전까지 내 옆에 있었다. 들어가자 선영아. 데려다줄게.
말이 오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침묵 속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이 미친년이. 부모 얼굴에 똥칠하는 년이. 게을러빠져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년이. 응등해 갖고 가만 있는 사람까지 맥 빠지게 하는 년이. 즈이 오빠 발꿈치 때만도 못한 년이. 돈만 오사하게 드는 년이. 네년 잘하는 게 뭐가 있냐. 뭐 한다고 여적 밥도 안 해 놓고 있었냐. 저걸 딸이라고 내가 미역국을 먹었지.
엄마가 방문을 꽝 닫고 나가고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알면서도 욕을 했다. 난생처음. 분노에 폭발하여 소리를 질렀다. 미친년. 저러고도 엄마야. 밥이 대수야. 하. 하. 진짜 진짜 싫다. 아아아악. 벌컥. 방문이 열렸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뺨에 손이 날아왔던가. 속사포 같은 욕지거리를 자포자기하며 듣고 있었던가.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말도 귀담아 듣지 않기로 했다. 불쌍하고 두렵고 화나고 안타깝고 그리웠던 대상을 놓아 버렸다. 독서실비가 없어 학교 도서관 열람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와 막 책가방을 여는 내게 쏟아진 엄마의 말은 깨진 유리 조각이 되어 날이 갈수록 깊이깊이 파고드는 자상을 만들어 냈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공허해졌다.
그럼에도 살고 싶었다. 이 세상이 살 만하다는 것을 한 번쯤 느껴 보고 싶었다. 그걸 완전히 알게 됐을 때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조찬용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1학기 마지막 국어 시간을 보내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2학년 6반 박선영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따로 불러 이름을 기억하고 눈을 맞춰 주실 때 알았다. 살아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존재 자체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꼭 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뵈었던 가을에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어. 변산 촌구석에 있고 싶지 않았지. 어메한테 사정사정을 해서 서울 유학비를 받았어. 공고에 진학해서 시를 썼어. 닥치는 대로 썼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어.
깊은 회환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날 어쩌면 나는 예감했었는지 모른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생을 요약하듯 내게 말씀하셨다. 넉넉했던 친가가 망해 배곯던 이야기. 친척이 있는 서울 신월동에서 대학을 다니던 이야기. 배가 고파도 밥 달라는 말을 못 해 수돗물을 한 바가지 먹고 방 한구석에서 칼잠을 잤다는 이야기. 교직 생활을 하다 동신아파트를 사게 된 이야기. 가난에 대한 설움과 그로 인해 옷에 대한 집착이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힘든 것인지. 왜 시가 쓰고 싶은지. 왜 소설을 쓰고 싶은지를. 그러나 선생님은 알고 계신지도 몰랐다. 어느 날엔가 선생님께서 카톡 메시지를 보내셨다.
너를 제대로 키우고 싶었단다.
제대로란 뭘까. 지금의 나는 제대로가 아닌가. 선생님의 고백을. 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못난 제자라는 자격지심으로 읽었다. 해가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는 선생님의 소식을 들으면서 선생님과 나 사이에 허락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몇 번 노트를 뒤적였다. 선영아. 너는 시를 써야 해. 유언처럼 남기신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제 장기 속엔 부서진 유리 조각이 박혀 빼낼 수 없는데요. 말이 싫어 입을 닫았는데요. 그런 제가 시를 쓴다고요. 그 아름다운 시를요. 선생님께 전하지 못한 말이 가슴속에서 웅웅거렸다.
그날의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오래 생각해 왔다. 새 길에 대한 두려움. 학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나를 써 줄 곳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 두려움. 시를 쓰지 않고 언어를 들여다보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2년 등록금을 조달하기 위해 치러야 할 시간과 노고에 대한 까마득한 두려움. 그 무엇보다 나는 너무 젊기만 하다는 두려움.
누그러들었나 싶던 날. 사라져 버렸나 싶었던 날. 그럼 그렇지 그게 어디가? 했던 날. 나는 구제 불능이야 자기 비난에 빠져 있던 날. 그 숱한 날들이 지났다. 선생님은 곁에 계시지 않지만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 시를 쓸 마음이 생겼고. 두려움을 직면할 용기 또한 생겼다. 상처를 더 이상 상처로 두지 않게 되었고. 상처받은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다. 너무 무겁지 않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먼저 겪은 이가 전할 위로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엄마가 낳지 않은 나의 속은.
그렇게 채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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