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가 KT 동수원 지점(구 동수원전화국)의 아래 골목에 사실 때, 나는 금요일 하교를 집이 아닌 할머니 댁으로 했다. 6학년 3월부터 중학교 입학 전까지 대략 9개월을 그랬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나를 끔찍이도 예뻐하셨다. 제 새끼를 바라보는 어미의 눈빛 그 이상이었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가 참 좋았다. 연노랑 저고리에 남색 한복 치마를 받쳐 입고 은비녀를 찌른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에게는 없는 어떤 기품이 있었다.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 나오는, 짧고 당당한 말투가 듣기 좋아 남몰래 따라해 보기도 했다.
할머니는 장대비에 내가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하셨을 거다. 제법 소녀티가 나기 시작한 내가 짧은 반바지에 우산 하나 덜렁 쓰고 나가는 것이 계속 맘에 걸렸을 거다. 씻을 데도 마땅찮은데 흙투성이 장화와 쫄딱 젖은 몰골로 "할머니, 저 왔어요." 하고 들어설 때는 짜증스럽기도 했을 거다. 이미 몇 번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기억은 제멋대로 편집되어 있고, 커 봐야 어른의 마음을 병아리 눈물만큼 안다.
그게 다였다. 나가지 말라고 막거나 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딱 거기까지였다. 외할머니는 할 말만 하셨다. 늘 딱 할 말만.
한껏 노곤해져 배가 꼬르륵거리면 할머니는 까만 철제 프라이팬에 빨간 돼지고기를 볶았다.
촤악-치익-쉬익.
고기가 볶아지고, 익어 가고, 대파 숨이 죽는 소리를 감상하듯 들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으음~ 맛있는 냄새! 금세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오는 금요일이면 저녁때마다 나를 대동하고 꼭 정육점에 가셨다. 그리고 주인에게 점잖게 말했다.
"돼야지괴기 한 근 끊어 주쇼. 우리 손녀 덖어 주게."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가 아닌 '모시모시' 하던 할머니. 할머니 댁에서 자는 동안 예기치 않은 두 번째 생리로 당신 고쟁이가 빨갛게 다 젖었는데도 "우리 강아지 이리 온나." 하며 갈아입을 옷을 새로 꺼내 주시던 할머니. 약국으로 데려가, "우리 손녀 쓸 달거리대 하나 주쇼." 하던 외할머니.
그때도 난 조잘거리는 타입이 아니었으므로 할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눈 기억은 별로 없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작은외삼촌에 대한 그리움으로 늘 두 눈가가 붉게 짓물러 있었다는 것과, 어느 순간 그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파마머리를 하셨다는 것, 컴컴한 방 안과 <부모은중경> 같은 불경 테이프를 온종일 틀어 놓으셨다는 것, 영동 시장에 갈 때마다 버스 정류장에서 700원짜리 빙그레 바나나 우유를 어김없이 사 주셨다는 것, 돌아올 때는 작은 쟁반만 한, 갈색 땅콩엿을 선물인 양 사 주셨다는 것 정도가 불연속 필름처럼 끊어졌다 이어진다.
"죽상에가 먹고 자운디 할미랑 시장 구경 안 갈끄나?"
위가 안 좋아 늘 녹색 노루모 깡통에서 한 숟가락씩 회색 가루를 퍼 드셨지만 할머니는 죽상어를 참 좋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