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지 않은 생일 파티

by 어슴푸레

몸에 밴 친절은 부유함에서 온다.

일곱 살의 나는 초대받지 않은 생일 파티에서 이 사실을 너무 빨리 알아 버렸다.



어느 일요일 오전, 서울식당 윤경이가 친구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자고 우리 집에 왔다. 난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막무가내다. 털레털레 빈손으로 갈 순 없어 엄마한테 말하고 200원을 받았다. 공책 한 권에 1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간단한 학용품 정도면 생일 선물로 괜찮겠다 싶었다. 동전을 짤랑거리며 '오뚜기슈퍼'에 갔다. 말이 슈퍼지, 거긴 없는 게 없었다. 스케치북, 공책, 색연필 같은 알록달록 문구부터 반짝반짝 양은냄비와 색색깔 비눗갑까지. 가게는 깊고 넓었다. 이리저리 가게 안을 돌아다니면 머리가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연필 두 자루는 너무 볼품없고, 공책 두 권은 식상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나는 길고 짱짱한 민짜 까만 머리 고무줄을 2개 샀다. 포장은 안 해 준데서 두어 번 대충 접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으로 왔다. 포장지 같은 건 집에 없었고, 자투리 재단지로 둘둘 말기는 귀찮았다. '얼굴도 모르는데 뭐. 그냥 살짝 두고 와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윤경이를 기다렸다. 이윽고 안경 쓴 소연이가 같이 왔다.



그 애의 집은 아랫마을에 있었다. 하늘색 마크가 그려진 흰 벽, 한일냉장 왼쪽으로 언덕길이 나타났다. '우리 동네에 이런 데가 있었나. 다리 아픈데 대체 언제 나와.' 그러는 사이, 거짓말처럼 높고 큰 저택이 나타났다. 저택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저택이라는 말을 알 리 없는 일곱 살이었음에도, 그 집은 TV에서 숱하게 방영된 <미워도 다시 한번>의 부잣집보다 100배는 더 돈이 많아 보였다.



실내는 미로 같았다. 좁은 복도를 따라 걷다 꺾어져야 방이 나왔다. 와. 탄성이 터졌다. 사방이 아늑했다. 넓고 폭신한 침대가 방 중앙에 낮게 푹 들어가 있고, 베이지색 원목 책상이 얌전히 벽을 보고 있었다. 빨간 책상 의자는 젖히는 방향대로 편안하게 등을 감쌌다. 한참 동안 침대 위를 팡팡 뛰었다. 10분에 100원 하는 방방보다 안정감이 있었고, 높이 뛰어도 떨어질 걱정이 없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무리 뛰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생일 파티 하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그 애의 엄마는 엄마 같지 않았다. 늘씬하고 젊었다. 머리를 묶어 위로 단정하게 올린 차림이었다. 동네 초입에 있는 아리랑의상실에서나 봤을 법한 엷은 복숭아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윤경이 엄마, 소연이 엄마, 준석이 엄마 그리고 우리 엄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부인의 모습에 당황했다. 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의 엄마라니.


그 정도면 꽤 화려했을 생일상인데, 생일상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집의 외관과 실내에 압도되고 그 애 엄마의 기품에 충격을 받아서였을까. 이상하게도 생일상에 차려졌던 음식들이 기억에 없다. 부잣집이라고 해도 먹는 건 뭐 다 거기서 거기였을까. 케이크조차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때의 감정은 당혹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꺼낼 때였다. 윤경이는 나무로 된 집 모양의 저금통을, 소연이는 18색 크레파스를 내밀었다. 윤경이와 소연이가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선영아, 선물은?"

"......."

주머니에 대충 넣어 뒀던 까만 머리 고무줄을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애는 남자애였다. 얼굴도, 이름도, 성별도 모르고 친구들을 따라갔던 나는 당연히 여자앨 거라고만 믿었다. 윤경이도, 소연이도 그 애가 남자애란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말해 주었다면, 공책 두 권으로 충분했을 거였다.

"....... 있지. 나는 네가 여자앤 줄 알고...... 미안해."

접힌 까만 고무줄이 훌렁, 하고 펼쳐져 손에 딸려 나왔다. 정적이 흘렀다.


애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근데 괜찮아. 너 가지고 가서 써."

나는 상고머리였다. 머리를 묶기에는 심하게 짧았다.

애 엄마가 말했다.

"일부러 가져왔는데 친구 마음이 그렇겠다. 고맙다!"

어쩌면 그리도 경쾌하게 말하는지,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거실 한 편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검은색 피아노였다.

애 엄마는 일어나 피아노로 갔다. 조금 있다 그 애도 엄마 옆에 앉았다. 둘은 나란히 피아노를 쳤다.

나는 그렇게 치는 곡이 '연탄곡'이라는 걸 3학년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야 알았다.

애는 내가 1년 남짓 다니다 만, '현피아노'에서 윤경이와 소연이와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이름은 경제. 안경을 썼고, 짱구여서 두상이 동글동글했다.

얼굴이 희고, 손가락이 길었고, 귀티가 흘렀다.


애와 나는 6년 내내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았다.

애는 자기의 일곱 살 생일에 선머스마처럼 생긴 웬 여자애가 생일 선물로 까맣고 길쭉한 머리 고무줄 두 개를 가져왔던 걸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 애와 그 애 엄마 몸에 밴 친절이 고맙고도 슬펐다.

그런 미덕은 부유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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