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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금 여기

달콤한 맛으로 주세요

by 어슴푸레

우리 동네 사거리 초입에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다코야키(일본식 문어빵) 트럭이 온다. 60대쯤 돼 보이는 다코야키 사장님은 웃음도 많고 손님에게 우스갯소리도 잘하신다. 6시 퇴근 무렵부터 새벽 한두 시까지 자리를 지키는데, 지금도 그 시간까지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큰애가 다코야키를 좋아해서, 나는 주로 큰애의 수학 과외가 끝난 금요일 밤이면 아이가 귀가하기 전에 40분씩 줄을 서서, 12개짜리 다코야키 상자를 전리품인 양 사 들고 온다. 다코야키를 주문하는 사람은 중고등학생 커플부터, 나와 같은 아이 엄마, 산책 삼아 밤마실 나온 부부까지 각양각색이다.


2010년 1월, 남편과 함께 이른바 '태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3박 4일 하나투어 패키지로 오사카, 교토, 고베를 도는 일정이었다. 첫날, 오사카성 아래에 위치한 2층 목조 식당에 들어가, 다코야키 만들기 체험을 했다. 테이블마다 미니 화로와 길쭉한 접시, 집게 등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현지인이 시범을 보였으나 꼭 한 발짝씩 늦었다.

미니 화로에 불이 붙었다. 둥근 홈이 다섯 개쯤 파인 화로 상판에 기름칠을 했다. 반죽과 계란물을 섞어 동그란 홈에 차례차례 부었다. 으윽. 반죽이 금세 화로 상판 전체에 범람했다. 아, 망했다. 자고로 예쁜 거 먹어야 예쁜 아이 낳는댔는데. 마음을 진정하고 잘게 다진 문어와 생강절임을 반죽 위에 올렸다. 어느 정도 익었을 때, 흘러넘친 반죽을 기다란 나무 꼬챙이를 이용해 보를 싸듯 동그란 홈에 당겨 넣고 재빨리 돌렸다. 와! 제법 그럴듯하다. 모양 잡힌 다코야키는 동글동글 잘 구워진 탁구공 같았다. 직사각 접시에 다코야키를 집게로 옮겨 담았다. 마지막으로 돈가스소스를 바르고, 가쓰오부시를 올리고, 치즈 가루를 뿌렸다. 입 속으로 직행! '겉바속촉'의 다코야키로, 졸였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다코야키 만들기 체험은 대성공이었다.


코야키 판 세 개가 바로 눈앞에서 순식간에 비워졌다. 다시 20분은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기 지루해 큰애에게 말을 건넸다.


"아들, 엄마아. 너 가졌을 때 아빠랑 오사카 여행 가서 직접 다코야키 만들어 먹었다?"

"와. 정말요?"

"응. 그래서 네가 다코야키를 이렇게 좋아하나 봐."


코야키 사장님이 불쑥 한마디 하셨다.

"이야. 네가 말로만 듣던 모태 다코야키구나?! 그럼 그럼~ 모태 다코야키는 못 당하지."


남편이 삼척으로 출장을 갔다. 저녁 하기가 귀찮아 다코야키로 간단히 때울 겸, 사장님 트럭에 갔다. 오늘은 앞에 한 사람밖에 줄을 안 섰다. 이 무슨 횡재람.


"달콤한 맛으로 9개짜리 한 상자, 12개짜리 한 상자 주세요."


휴대폰에서 은행 앱을 열어 트럭 뒤에 붙어 있는 계좌 번호로 7000원을 입급하고 카톡을 확인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담으려다 말고 다시 물으셨다.


"무슨 맛으로 드릴까?"

"둘 다 달콤한 맛이요."

"우리 집엔 달콤한 맛 없는데?"

"아."

그제야 '고소한 맛', '매운 맛', '순한 맛'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를 확인했다.

"고소한 맛으로 주세요."

"애 엄마가 착한 사람이네. 세상을 달콤하게 보거나, 힘들어도 세상이 달콤했으면 하니까 '달콤한 맛'으로 달라고 하는 거지."

"하..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 뭘. 내가 이 장사한 지 20년이 넘었어. 딱 보면 안다고. 아기 엄마 눈이 선하네."

"......."

"앞으로 인생이 쭉 달콤하길 바래요! 아니, 달콤할 거야!"


좋은 말로 융단 폭격을 하시기에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일부러 훈훈하게 말씀하시는데 정색하고, "아기 엄마 아니에요." 하기도, "저 그렇게 안 착해요." 하기도, "그냥 무심코 한 말이에요." 하기도 뭐했다. 그저 고맙고 고마웠다. 단번에 다코야키 구매에 성공한 것도 행운인데, 이토록 주문 같은 덕담이라니. 간식을 사러 갔다, 말[言]로 복(福)을 받은 기분이었다. 사장님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말로 복을 짓는 분 같았다.


집에 돌아와, 캔 맥주를 한 통 따서 유리컵에 따랐다. 다코야키 상자를 열었다. 어라, 한 개가 더 많네. 덤까지 챙겨 주신 사장님의 마음 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맞다! 큰애더러 '모태 다코야키'라는 귀여운 별명을 지어 주신 날도, 한 개가 더 많았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한 개씩 더 넣어 주시는 걸까. 그렇데도 기분이 좋았다. 손님이 길게 줄 서서 기다리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 건지, '고객 관리' 차원에서인 건지는 몰라도 하나 더 먹으라도 챙겨 준, 마음 씀이 고마웠다.


사장님의 말씀대로, 달콤한 저녁이었다.

힘들었던 주중을 잠시 잊게 할 만큼, 다디단 저녁이었다.


사장님의 인생 또한 쭉 달콤하길 바라며, 배우 김정은의 BC 카드 CF를 흉내 내어 본다.


사장님~ 사장님~
부우우우자 되세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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