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 사전쟁이

덜컥의 순간들

by 어슴푸레

수학 선생님이 내 번호를 부르면 덜컥 겁부터 났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 시험 대비 클래식 테이프를 듣고 있으면 덜컥 교실 문이 열렸다.

사는 게 부조리하다고 느낄 때면 조찬용 선생님께 덜컥 편지를 써 보냈다.

화홍 문화제 백일장에서 덜컥 만난 조찬용 선생님께 '덕분에 괜찮아요.' 활짝 웃어 보였었다.


남편을 사적으로 처음 만난 날 나는 이이의 손을 덜컥 잡았고

그만 헤어지자며 두어 차례 그의 고운 손을 덜컥 놓았다.

덜컥 청혼을 받은 나는 남편과 결혼을 했다.

남편은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덜컥 A형 간염에 걸렸고

이러다 남편이 덜컥 죽으면 어쩌나 마음고생을 했다.

퇴원 후 두 달이 지나 나는 덜컥 엄마가 되었고

아이에게 읽힐 책을 사겠다고 없는 살림에 전집을 덜컥 들였다 반품했다.

둘째가 덜컥 생겼고 그렇게 나는 오누이의 엄마가 되었다.

덜컥 집을 계약했고

직장이 힘들 때마다 덜컥 숙소를 예약해 가족 여행을 떠났다.

각종 교열 아르바이트를 덜컥 받아 온 나는 잠을 쪼개 일을 마쳤다.

마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 덜컥 박사 과정에 들어갔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덜컥 내려앉는 마음에 매 순간 위태위태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엔 제법 그럴듯한 조각보가 놓여 있다.

여러 순간의 덜컥이 잇대어져 공평하게 구획되어 있다.

매번 일을 저지르고 놔 버리고 수습하며 휩쓸리듯 살았으나 또 매번 늦지 않은 결단으로 지금의 형체를 얻었다.


살아 있는 한, 언제고 다시 올 덜컥의 순간들.


덜컥 언제, 어떤 문이 열릴지 알 수 없어 두근대기까지 한다.


덜컥 나던 겁과는 분명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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