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 사전쟁이

조직 생활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by 어슴푸레

지난 화요일 오전, 옆 과 친구가 내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바로 복도로 나갔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고 친구가 나왔다. 반갑게 웃으며 기념품을 건넸다. 엄마와 경주 여행을 다녀왔단다.


친구와 손 인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와 앉았는데 일이 손에 안 잡힌다. 외부망 포털에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채용 공고'를 검색한다. 목요일 마감까지 아직 이틀이 남았다. 채용 분야를 빠르게 훑어 봤다. 채용형 인턴이라. 인턴은 인턴인데 채용형이라. 이건 무슨 직제일까. 금세 점심 시간이 되어 검색 창을 닫았다.


집에 들러 대충 밥을 먹고 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누리집에 들어가 지원 문서를 다운받았다. 자기소개서와 직무 수행 계획서. 엥? 이거밖에 없다고? 경력 증명서나 재직 증명서, 학위 수여 증명서 같은 건 첨부하지 않는다고? 아. 1차 서류로 거른 다음에 그때 증빙 서류를 내라고 할 건가 보군. 어디 보자. 어느 분야로 지원을 해야 하나.


그날 내내 나는 되도 않는 행복 회로를 돌렸다. 만에 하나 채용이 되면 송도까지 출퇴근은 어떻게 하나. 이사를 가야 하나. 그러면 중학교 입학을 앞둔 큰애는 또 어떻게 되나. 엄청 바쁠 텐데 두 애 케어는 어쩌나. 사람이 뭔가에 완전히 사로잡히면 오로지 그것만 보인다. 박물관 관련 '전시/소장 자료 관리/교육' 경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어문 계열, 국가 기관 6년 이상의 경력, 석사 학위 소지자로서 2년 이상의 경력"만 순진하게 믿고 김칫국만 시원하게 마시고 또 마셨다. 내봤자 '서류 광탈'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계속 마음은 왔다 갔다 했다. 직무 수행 계획서는 어떻게 쓰나. 뭘 쓰지. 하아-.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모르는 걸 쓸 수는 없었다. 구글링을 해서 운 좋게 비슷한 세부 실행 계획서가 얻어 걸려도, 모르는 걸 아는 것처럼 쓸 수는 없었다. 하늘이 도와 서류가 된다 해도 잔뜩 움츠린 채 또다시 면접자석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사업과 직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자에게서 진정성 있는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사직의 그럴듯한 이유가 박물관 합격이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어차피 돈도 안 들고 온라인 지원이니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그렇게 1차가 되어 남편에게 "나, 면접 보러 가."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새로 설정한 삶의 목표와 방향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또다시 미혹되었다. 그놈의 '연구직 공무원'이라는 사회적 신분 상승에. 만년 연구원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불나방처럼 뛰어들려는 것이었다. 학습된 실패와 무기력을 잠시 잊고 또 욕망하는 것이었다.


샘이 지원해.
나는 조직 생활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래 놓고 다시 맞붙고 싶지 않아 어느 분야로 지원할지 슬쩍 물어보기까지 했던 거였다. 그렇게 다쳐 놓고 또 도전할 생각을 하다니. 홀린 게 분명했다.


아직도 내게는 남의 이목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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