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봤을 때 그림 크기에 압도됐다. 이윽고 오월의 색을 한 나무 위에 사람이 새처럼 깃들여 쉬고 있는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다음으로 교감하듯 서로를 응시하는 두 마리의 갈색 개에게 눈이 갔다.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하얗게 내려앉은 건 눈일까, 누에일까. 앗! 남성의 어깨 위쪽에 자리한 잘록한 형체는 새의 형상. 짧고 뾰족한 것은 영락없이 부리. 그림 왼쪽의 남성은 새와 나무와 개를 위해 조용히 비껴 앉은 모습이었다.
김은정 작가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하얗게 내린 것이 여름철의 백로 떼라는 걸 알았다. 백로 떼가 한데 모여 새끼를 까고 한동안 지내는 느티나무나 소나무 등을 두고 '백로 나무'라 부른다는 것도. 이 작품의 이름은 <흰 눈 내린>이었다. 무리를 지어 나무에 내려앉은 백로의 모습을 눈처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새 이름인 '백로(白鷺)'와 '흰 이슬'의 '백로(白露).' '백로 나무'에 '흰 눈 내린'이라 이름 붙인 것이 시적으로 느껴졌다. 작가님의 개인전, '매일매일( )'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이 <흰 눈 내린>이었다.
본디 새들의 보금자리인 나무를 사람들은 베어 버린다 했다. 자연과 같이 살아야 할 인간이, 백로 떼의 독한 배설물에 나무가 죽는다는 이유로, 백로 떼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백로 나무를 무자비하게 없앤다 했다. 백로 떼는 인간의 무차별적인 벌목에 나무와 함께 쓰러져 새끼, 어미 할 것 없이 몰살을 당하기도 한다 했다. 그리고 산책길에 우연히 목도한 백로 나무에 상상을 더해 '생태', '환경', '공생' 등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했다. 작가님의 그림에 연결된 '이야기'가 조금씩 변주되고 있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끝말잇기처럼 반복되는 그림과 오브제는 일관되게 메시지를 전하는 시어(詩語)처럼 시종 반짝거렸다.화가는 점과 선과 면으로 시를 쓰는 시인과 다름없었다.
나는 작가님을, 아니 선생님을 4년 전에 알았다. 선생님에게서 독립 출판을 배웠다. 작품을 할 때마다 독립 출판물로 작품에 대한 기록을 필모그래피로 남기는 선생님이 멋있었다. 눈이 곱고 말이 고운 선생님이 참 좋았다. 비록 6주를 만났지만 늘 궁금했다. 그사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온 세계를 휩쓸었고 선생님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개인전 소식을 부러 알려 주신 선생님께 몹시 감사했다. 선생님은 작품 설명을 해 주러 시간을 내어 학고재에 오셨고, 세 개 층에 나뉘어 전시된 작품 수에 나는 그간 작품을 위해 보냈을 선생님의 시간이 천금처럼 무거웠다.
오늘은 개인전 마지막 날. 성황리에 잘 마치셨으리라 믿는다. 시간이 흘러 금전적 여유가 됐을 때 꼭 선생님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