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 사전쟁이

2세대 사전쟁이는 이만 퇴장

by 어슴푸레

퇴직 D-27일을 앞두고 상을 받았다. 그것도 15년 만에.

업무 추진에 공이 있는 사람, 창의적이고 성실히 일을 수행한 사람, 정년퇴직을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상을 수여한다는 신 사무관님의 소개가 이어졌다. 호명되는 순서대로 원 단상에 올랐다. 차례가 되어 상을 받고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고 사진 촬영을 하는 사이 정신이 자꾸만 멀어졌다. 국어원에서의 19년이 페이드아웃되고 있었다.


1999년 <표준> 사전이 종이 사전으로 발간되기까지 고생고생한 수백 명의 편수원을 제1세대 사전쟁이라 이름할 수 있다면 나는 2008년 <표준> 사전 개정 작업을 위해 원에 들어왔으므로 제2세대 사전쟁이라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중반, 국내 포털 사이트들이 사전 검색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시디롬 형태든 전자수첩 형태든 할 것 없이 전자사전까지도 수요가 계속적으로 줄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무겁고 휴대하기 불편한 종이 사전을 사려 하지 않았고 좀 더 가벼운 시디롬이나 전자수첩 형태의 전자사전을 사는 데 경제적 부담을 느꼈다. 때마침 사전 시장은 패러다임이 변하는 격동기였고, <표준> 사전은 2008년 10월, '정부 2.0'의 시대적 흐름에 맞게 국민이 사전 정보를 검색해 활용할 수 있도록 웹 사전 형태의 개정판을 내기에 이른다. 바로 이 지점을 두고 사람들은 <표준> 사전이 민간 국어사전 시장을 잠식한 거대 공룡인 동시에 국내 사전 시장을 망하게 한 주범이라고 너도나도 소리 높여 한목소리를 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비판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된 건지 아무도 찬찬히 따져 보려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2005년 광랜의 대중화에 힘입어 이미 사전 시장은 제3차 산업 혁명이라 할 만한, 정보 혁명 중이었다. 국어사전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영한사전을 비롯한 이중 언어 사전, 각종 전문 용어 사전도 같은 상황이었다. 당시의 국내 사전 시장 대부분은 종이 사전 형태를 유지한 반면, <표준> 사전은 시대적 흐름에 맞게 웹 사전으로 전환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 결과 국민들은 인터넷 서비스 환경만 주어지면 시공을 초월해 바로바로 <표준> 사전을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보완심의회'라고 하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정보를 주기적으로 갱신함에 따라 신뢰성은 자동적으로 담보되었다. <표준> 사전이 언론, 각종 출판사, 국정/검인정 교과서 등의 강력한 기준이 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누구도 <표준> 사전의 힘이 현재와 같이 강해질지 예상치 못했다. 그 누구도 <표준> 사전의 역기능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표준> 사전은 이후에도 정부 3.0에 맞게 충실히 사전의 소임을 다할 뿐이었다.


사전이 공공재가 된 것이 그렇게까지 욕먹을 일인가.
공공 정보를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개방하고 공유토록 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인가.
격랑의 시대에 필수적일 수밖에 없던 당시 출판 시장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왜 유독 <표준> 사전, 너 때문이었다고
독하게 몰아세우는가.

2022년 12월 현재에도 <표준> 사전은 제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맞게 좀 더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열일 중이다. 제2세대 <표준> 사전과, 제3세대 <우리말샘> 개통에 이어 제4세대 <표준> 사전 개편을 위해 사전팀 전체가 애쓰고 있다. 제2세대 사전쟁이로 들어와 제4세대 <표준> 사전이 꽃피우는 것을 끝까지 못 보고 퇴직하게 됐지만 사전쟁이로서의 내 역할은 어쩐지 여기까지인 것만 같다. 부디 사전팀이 안팎으로 너무 힘들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동안 모두 고마웠어요.
국립국어원 어문연구과 사전팀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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