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근무일, 새벽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둑한 아침, 8시 시차 출퇴근을 위해 집을 나섰다. 눈발은 굵었고 길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메아리 공원을 지나 원 후문을 통과해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데 현관 천장 곳곳에 매달린 알전구들이 점점이 빛났다. 눈 오는 날의 국어원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신이 닳게 19년을 오간 길과 건물이 달리 보이는 아, 이것은 '어메이징 퇴직 효과?' 출근 시간 지정을 위해 바삐 걷는 와중에도 시선은 계속 현관에 고정되었다. 급기야 저 혼자 기념식이라도 하듯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 '내 마음속에 저장' 되었다.
초콜릿과 작은 손 편지를 담은 꾸러미를 들고 2, 3층을 오르내리며 배달했다. 뾰로롱, 조용히 '퇴직 요정'이 되고자 했으나 시차를 하는 이가 예상보다 많았다. 본의 아니게 아침 댓바람부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조금 민망했다. 5시엔 각 과 과장님과 실장님께 인사를 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윤희 샘의 선물이 자리에 놓여 있었다. 화사한 프리지어와 손 편지, 귀요미 캐릭터 감사패였다.
9시가 되자 카톡과 내부망 메신저, 외부망 메신저에서 몇초 간격으로 알림이 왔다. 자리에 놓인 초콜릿을 보고 고맙다는 인사와 미래에 대한 덕담, 뒤늦은 점심 약속 등 저마다의 이유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가 순간 울컥했다가 아무렇지 않다가 행복했다가. 점심 시간이 되기 전까지 마음은 수백 번 롤러코스터를 탔다. 전달받은 사직원과 퇴직자 보안 서약서에 사인을 해서 담당 연구사 선생님께 드렸다. 그제야 진작에 넘겼어야 할 신어 추출 및 집필 지침이 생각났다. 오늘 중에 끝낼 수 있을까. 일주일 사이 너무 게으름을 피웠다.
내 발등을 마지막 날까지 찍고 가는구나.
후회는 늦었고 부스터 달고 다다다닥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편찬기를 캡처해서 지침에 넣고 역대 최고로 맘에 들지 않게 최종본을 만들어 내부 메일을 보냈다.
아영 샘, 윤희 샘과 라멘을 먹고, 커피를 사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송별회 겸 차담회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반. 파일에 철해 두었던 연도별 회의 자료와 결정 사항, 업무 지시 메일, 업무 분장표, 원내 전화번호부 등에서 스테이플러 심을 뽑아 문서를 파쇄기에 넣고 차례차례 파기했다. 끝으로 수북한 명함을 갈아 넣었다. 피시에 저장돼 있던 석사 논문 폴더를 삭제하고, 즐겨찾기 폴더를 삭제하고, 나루를 통해 다운받았던 여러 문서들을 삭제하고, 역대 근무평정서들과 연말정산신고서 등을 삭제했다. 피시의 디렉터리에는 오롯이 업무 문서만 남았다.
후임자가 쓸 수 있도록 내외부망 피시의 비밀번호와 작동법을 적어 아영 샘에게 주었다. 나달나달해진 <표준 편찬 지침>과 <2008년 개정 보고서>를 물려주고, 책상 서랍을 싹 비워 열쇠를 건넸다. 머그와 양치컵, 칫솔, 치약, 액자 등 잔짐들을 작은 가방에 담고 버릴 책과 집에 가져갈 책을 구분해 쌓아 놓으니 차담회 시간이 다 됐다. 4층 강의실에는 나를 위한 케이크와 차가 책상에 놓여 있었고, 책상은 모두가 둘러볼 수 있게 장방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사전팀 모두 앞에 나가서 사진 찍자.
팀장님의 제안에 따라 11명의 팀원이 2열로 줄을 섰다.
이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차와 케이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번 고비가 왔다.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졌고,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시선을 피했다. 눈은 웃고 있었으나 중간중간 먹먹했다. 19년을 회고하는 동안 둘러앉은 샘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대부분 웃고 있었다. 웃는 모습을 보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5시가 다 되어 3층으로 돌아왔다. 진흥과 유원 선생님이 내게로 와 두 손을 잡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표현하지 못해 미안했다며 눈을 맞추며 웃었다. 겨우 눈물을 참았다.
특수과 과장님을 시작으로 마지막 인사를 돌았다. 이미 퇴근한 분들이 많았다. 아쉬움 가득한 인사를 하고, 또 몇 차례 밀려오는 고비를 씩씩하게 넘겼다. 농담처럼, 사직원을 접수하지 않겠다는 말, 아직 정식 퇴직까지 한 달 남았으니 쉬는 동안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 그러면 채용 공고를 취소할 수 있다는 말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그리 마음이 안 바뀌냐고 했다. 이렇게 결단력이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고 했다.
5시 20분, 뒤늦게 나루에 퇴근 시간 지정을 하고 피시를 껐다. 이제 이 피시를 내가 켜는 일은 없을 거였다. 팀장님과 팀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싸 둔 짐을 들고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숙 샘이 울었다. 진 샘이 급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손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윤희 샘과 상은 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얼른 다른 곳을 보았다. 로비에서 마침내 인사를 하고, 30분 넘게 나를 기다린 딸애와 함께 손을 잡고 국어원을 나섰다.
이런 날이 올 거라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그날이
눈앞에서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