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문서를 한데 모아 디렉터리 정리를 했다. 19년의 세월이 업무별, 시기별로 묶여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언제고 클릭하면 줄줄이 시간 순서대로 정렬돼 나타나던 업무 문서들. 오래지 않아 이 피시를 사용할 후임자에게 불러들여질 순간을 상상하니 금세 케케묵은 일기장을 들킨 기분이 든다.
언제나 남는 쪽이었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보여 아쉬워했고 깊은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다. 어쩌면 떠나는 쪽보다 남는 쪽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한지도 몰랐다. 이제는 떠나는 쪽에서 매일매일 문을 열고 나갈 채비를 한다. 문밖은 돌이킬 수 없는 광야다. 예상보다 더 춥고 센 바람이 불 것이다.
어젯밤, 전임 팀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미 퇴직 소식을 전해 들으셨다 했다. "응.", "그랬구나.", "잘 결정했어.", "다른 길도 있으니 다 닫으려고는 말고." 등의 말씀을 하셨다. 날 향한 염려와 애정, 신뢰가 가득한 목소리에 마음이 자꾸 물러졌다. 이분께 처음 사전 일을 배웠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고 계획을 세워 업무를 추진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닮고 싶었다. 언젠가 내게 사전 원고 가운데 가장 맘에 드는 단어가 무엇인지 물으셨다. 나는 "보람"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샘도 참 어지간하다." 하셨다. 난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아플 때, 남편이 실직 중일 때, 큰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등 내 삶의 사건 사고를 조용히 지켜보셨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해 주셨다.
설 연휴를 제하면 마지막 근무일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개인 문서와 사진들을 파기하고, 누렇게 바랜 편찬 지침과 2008년 개정 보고서를 괜히 펼쳤다 닫는다. 사무실의 짐을 줄이고 주말 어느 날엔 가족과 함께 사무실에 들러 잔짐을 빼서 차에 실을 것이다.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인생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이곳과 헤어질 날이 거짓말처럼 다가오고 있다.
사전과 사람은 참 많이 닮았다.
끊임없이 들고 나며,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어휘장을 형성한다.
사전 일을 이토록 오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사람이었다는 걸 안다. 사람이 있어 살 수 있었다. 사람이 있어 일어설 수 있었다. 사람이 있어 숨 쉴 수 있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결국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같이 쌓아 온 시간의 켜가 서로를 단단히 잡아 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