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투비 T 맏딸
우리 집안에서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그중 하나는 딸내미 그러니까 내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 것.
내 방에는 창고로 쓰는 다락방과 개인 욕실이 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식구들이 들어올 일이 있는데, 일단 아빠와 동생은 노크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조심스럽고, 보드라운 어투로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본다.
그 노크 전까지도 꽤 고민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는데,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 때문에 다들 고생이구나 생각도 했다.
엄마는 그리 눈치를 안 보는 것처럼 문을 확 열어젖히지만, 노크를 하라는 내 말에는 또 미안하다며 웃는다. 그리고 한동안은 노크를 한다. 다만, 노크 후에 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로 문을 열어버리는 게 문제지만.
사실 우리 집은 나 빼고 전부 방 문을 열어놓고 산다. 하지만 혼자 오래 살았던 나는 식구들이 내는 소리나 참견을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혼자 머리 식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 방의 문은 거의 언제나 닫혀 있다.
그 닫힌 문이 마치 거리감으로 느껴지는 걸까? 엄마는 간혹 문을 열고 있어 달라고 말하지만, 일방적인 요구이기 때문에 고개를 젓는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면 충실하게 거실에 앉아 방은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그만큼 내 시간도 완벽하게 내 것이길 바라니까.
여하튼, 이런 빌런은 대체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내 첫 번째 대답은 '타고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독했다. 꾸지람을 들을 때 울며 비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눈물을 기어이 참아내고, 눈으로 난 잘못하지 않았다 외치는 그런 아이였다. 엄마에게 들은 말이니 아마 정확하겠지.
차라리 요령껏 애교라도 부리거나 도망가거나 하면 될 것인데, K장녀인 점에 천성적으로 독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환장 파티였달까?
어릴 때부터 빌런의 성정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 머리가 클 때까지, 겉으론 얌전한 척 지냈다. 서울에서 대구로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기 전까지는.
아빠의 회사 발령으로 가게 된 대구는, 일단 억양이 강했다.
당시 처음 전학 가서 들은 이야기는 "서울 촌년"이라는 말이었다. 내 말투가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나는 사투리를 빨리 배우려고 애썼다. 다행히 어릴 때부터 모르는 친구들과 다니는 캠프 경험 같은 게 많았기 때문에 적응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사투리를 익히자 그곳의 친구들도 더는 전학생이 아니라 같은 반 친구로 대해주기 시작했고, 말만 억세지 생각보다 정이 많은 모습에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또 정이 많은 건 많은 거고, 강인한 멘탈의 소유자들이었던 기억도 있다. 덩달아 나 역시 나를 굳이 숨겨 얌전한 척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그러니 그곳으로 전학 가 솔직한 표현을 할 수 있게 된 게 두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한 번 내놓기 시작하니 더는 숨기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나는 호불호가 강하다. 좋은 건 진짜 좋은 거고, 싫은 건 진짜 싫은 거다. 좋은 것에도 싫은 것에도 분명한 순위가 있을 정도. 나에게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 그러니까 중간 감정은 거의 없다. 그저 좋아지는 과정과 싫어지는 과정이 있을 뿐.
평소 그리 살가운 성격도 아닌 나는 내 방식대로 애정을 표현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대할 때 정말 명확하게 달라지는 온도의 차이가 내 방식의 표현인 셈. 그래도 나이가 차면서 숨길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일부러 숨기지 않는 순간도 여전히 많다.
좋고, 싫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고, 나는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에 치중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은 그냥 무시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열정을 쏟는다.
아직 좋아지는 과정과 싫어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면(사실 이 과정이 내겐 꽤 길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상대를 대한다. 투닥거리기도 하고, 고민을 이야기하면 진지하게 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성격 때문일까, 항상 평가가 갈린다. 누군가는 내게 따뜻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내게 정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다 맞는 말이다.
나는 내 사람이라고 인식하면 한없이 따뜻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절대 공감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으니까. 차라리 전혀 모르는 타인에 대해 연민하는 게 더 자주 있는 일이라서 싫어하는 사람일 바에는 아예 모르는 사람인 게 나을지도.
덕택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남들 보기에 기가 세고, 우리 집에서는 최고 빌런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사실인 거 같다. 바깥으로 꺼내지 않는 말이라도 속으로 내가 한 생각을 스스로에게는 숨길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내 속 생각은 생각보다 무심해서 가끔은 나조차 놀라기도 한다.
나는 MBTI 검사를 아주 오래, 여러 번 했고, 또 제대로 받아본 적도 있다. 그 모든 순간 똑같이 ENTP가 나왔다. 사실 나는 내 MBTI가 마음에 안 든다.
대충 외향적인 또라이 느낌이라서.(ENTP 동지들 미안합니다.)
게다가 T 성향이 너무 강해서 가끔 의도치 않게 상대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냥 감정에 공감해 주면 될 걸, 굳이 왜?를 찾거나 논리로 대하는 내 모습에 상처 입은 친구들도 꽤 있었던 것 같다.
노력하면 F의 성향이 있는 척까진 할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
그렇다 보니 감정적으로 부딪혀 오면 논리로 반박하는 내가 식구들에게, 특히 F 성향이 강한 엄마에게는 무척 힘들 거라 생각한다.
보통 엄마가 감정적으로 뭔가 조르기 시작하면 가족 대부분이 그냥 들어주는 편인데, 나한텐 그게 잘 안 되니까.
다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
가끔은 가족이니까 넘어가줄 수 있는 부분인데도 그런 게 없으니 얼마나 대하기 까다로울까?
분명 가끔은 엿 같을 때도 있을 거다.
그래서 나름 방법을 찾은 건 '유쾌함'과 '돈 쓰기' 정도?
월급을 받으면 가족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주말 하루 저녁은 꼭 가족들과 함께 보낸다. 그리고 내 독설은 유쾌한 한 겹을 뒤집어쓴 채 가족들을 웃게 만드는 무언가가 됐다.
덕택에 이제는 식구들과 장난스럽게 빌런에 대해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껏 웃고 떠드는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됐다.
노력이 많이 들어갔지만, 오래 즐거우니 효율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