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아이들이다
넷플릭스에서 Freedom Writers (한국 개봉제목 : 프리 라이터스 다이어리, 2007)라는 영화를 보았다. 캘리포니아 LA 근처 바닷가인 롱비치의 한 고등학교에서 LA 폭동이 일어난 직후인 94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23살에 새로 고등학교 교사가 된 에린 그루웰 (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주인공으로 나왔던 힐러리 스왱크가 역할을 맡았다)은 인종통합교육 정책에 의해 다양한 인종이 함께 교육을 받고 있는 윌슨 고등학교로 부임한다. 말이 통합교육이지 라티노, 흑인, 백인, 아시안계로 극명하게 나눠진 아이들은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은 물론, 적대시하며 폭력을 사용한다. 교실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다. 영화는 이런 현실을 방관하는 다른 교사들이나 교육담당자와 달리 교실을 바꿔보려는 한 여자 교사의 외로운 분투기를 그리고 있다. 훌륭한 교사의 출현으로 말썽꾸러기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는 영화는 많았지만, 이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두었고 아픈 교육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실감 나게 그려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청소년기를 거친 욱이의 아빠인 나는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눈물을 지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힘들게 청소년기를 거쳐왔고, 그렇게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둔 부모로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해왔다. 욱이가 대학생이 된 지금도 물론 그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를 통해 본 당시의 교실은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은 몇 개의 패거리로 나뉘어 패싸움을 하고 때론 총을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가정에서부터 버림받거나 상처 받고, 때론 학대받는 아이들은 희망을 잃었고 서로를 미워하며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춘기의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방황도 하고 일탈도 하며 학교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속 94년도의 롱비치는 무서운 아이들의 살벌한 전쟁터 같았다.
제목은 풋볼데이인데 웬 영화 얘기가 길어지는지 독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영화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이 영화를 본 바로 그날, 나는 우리 동네에 있는 Segerstrom 고등학교에서 열린 야간 풋볼 경기를 문제의 10대 고등학생들 틈에 앉아서 보았기 때문이다. ㄷㄷㄷ
참고로, 내가 사는 산타 애나(Santa Ana)는 33만 명의 인구 중 77.9%가 히스패닉이라고 불리는 라티노들이고 빈곤율은 거의 20%로 5가구 중 1가구는 빈곤층이다. 구글에 산타 애나를 검색하면 관련되어 첫 번째 질문으로 나오는 것이 '산타 애나는 가난한가?', 이고 두 번째 질문이 '산타 애나의 라티노 비율은?' 일 정도로 이곳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서도 못 사는 히스패닉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타운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였고,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같이 가자는 아빠의 간곡한 권유를 차갑게 뿌리친 욱이의 배신으로 혼자 동네 고등학교에 가서 풋볼을 보게 된 나는, 소리를 지르며 학교를 응원하는 학생들 틈에 뻘쭘하게 다가가 앉았다. 아이들은 처음에 웬 아시안 아저씨가 자기들 틈에 끼어 앉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어쩌면 아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데, 그날 본 영화의 안 좋은 기억이 남은 내가 혼자 느낀 것일 수도 있다. 하여튼 아이들 가운데 앉기는 앉았으나 낯선 풍경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미국에서 풋볼이 차지하는 위상이야 누구나 안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이자 야구나 농구 같은 다른 종목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국의 상징이 바로 풋볼이다. 이곳 산타 애나의 작은 동네에서 열리는 고등학교 풋볼 경기이지만, 많은 학생들과 학부형들, 그리고 나 같은 동네 주민들이 함께 즐기며 응원하는 동네 축제 같은 느낌이었다.
치어리더들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멋진 춤과 어려운 아크로바틱까지 보여주며 응원을 주도했고, 한 선생님과 몇몇 아이들로 이루어진 응원단장들은 구호와 노래를 선창 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치어리더들의 한가운데에는 눈에 띄는 남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유연한 춤으로 다른 단원들을 이끌고 있었다. 여자들만 있는 치어리더팀에 남학생 혼자 있다니, 나는 그의 용기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늘 멋있다.
학생들과 얘기를 하고 싶었다. 먼저 가만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았다.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이런 얘기들이었다.
"오늘 게임 끝나고 파티 올 거야?"
"못 가. 엄마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
"술 마시러 갈 거지?"
이곳에서도 여학생들은 풋볼 규칙을 잘 모르는지, 옆에 앉은 남자 친구가 계속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뒤에 앉은 남학생에게 몇 학년인지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치어리딩팀에 남자가 있는 것이 흔한 일이냐고 물었다. 그 남학생은 흔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색하게 대화 끝. 나는 다시 옆에 앉은 매우 어려 보이는 여학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들은 신입생이니 아니면 중학생들이니?"
"저는 신입생이고 얘는 2학년이에요."
앗 실수했다. 중학생이냐고 묻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다시 어색하게 대화 끝.
하프타임 때는 치어리더들이 그라운드에 나가서 공연을 했고, 홈커밍 킹 앤 퀸 시상식이 있었다. 홈커밍 킹 앤 퀸은 풋볼 홈경기 때 시상을 하는 가장 인기 있는 남녀 학생을 말한다. 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옆에 앉은 여학생들에게 홈커밍 킹 앤 퀸은 어떻게 선발하냐고 물었다. 학생들의 직접 투표로 뽑는데 요즘은 온라인 투표를 한다고 했다. 각 학년별 홈커밍 킹과 퀸이 호명될 때마다 뒤에 앉은 여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내 뒤의 여학생들은 특히 4학년 홈커밍 킹인 '스티븐'에게 아이돌 스타 급의 환호성을 보냈다. 나는 뒤의 여학생 중 한 명에게 왜 그렇게 스티븐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He is so cute."
내 우문에 대한 짧지만 확실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 여학생들이 애타게 부르던 그 스티븐이 우리를(아니 소녀들을) 찾아왔다. 소녀들은 거의 아이돌 팬클럽 수준으로 열광했다. 나는 왜 여학생들이 그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He was so cute! 그의 미소에 반하지 않을 여학생이 있을까 싶었다. 그는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경기도 재미있었다. 재규어들(Jaguars, Segerstrom 고등학교팀의 이름)은 시종 끌려다가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끝나기 5분 전에 29대 28, 한 점 차이로 역전을 시켰다. 스타디움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동네 아저씨인 나도 덩달아 환호성을 질렀다. 처음 본 우리 동네 풋볼 경기가 이렇게 짜릿한 역전승으로 끝나다니, 행운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과 가족, 친구들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서로를 축하했다. 선수들과 가족들은 대부분 히스패닉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인 풋볼을 즐기는 미국인들이었다. 내가 영화에서 봤던 무서운 아이들은 여기 없었다. 자기 학교를 대표해서 열심히 뛰고, 또 이들을 응원하는 귀여운 아이들과 히스패닉계 이민자로 미국에 와서 주로 미국인들이 마다하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가족들을 잘 부양하고 자녀들을 키워내는 부모들이 있을 뿐이다. 한국계 이민자들을 포함해서 낯선 외국 땅에 이민자로 와서 정착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고 자녀들을 키워 내는 부모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침에 조깅을 하다 보면 7시도 채 안된 이른 시간에 아이 둘을 학교에 내려주고 출근하는 히스패닉계 엄마들과 아빠들을 본다. 부모들은 성장하는 자녀들을 바라보며 기꺼이 그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영화와 풋볼, 두 가지를 다 본 금요일, 나는 비록 조금 가난할지라도 히스패닉들이 많이 사는 우리 동네 산타 애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힘겨워하는 아빠로서 욱이와 함께 성장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