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국제 영화제

뉴포트비치에서 한국 영화를 만나다

by 라떼

내겐 작은 꿈이 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가서 한 열흘간 주야장천 영화만 보기. 하지만 직장인들에게 10월은 한 해의 성과를 갈무리하고 정리하는 바쁜 시기이다. 그래서 아직 부산 국제 영화제는 가 보지도 못했다.


캘리포니아에 와서 지내던 어느 날 운전을 하며 프리웨이를 달리는데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뉴포트 비치 영화제(Newport Beach Film Festival) 10.21~28'

뉴포트 비치는 우리 동네에서 차로 20분만 가면 되는 해변가 도시이니 거의 우리 동네나 다름없다. 실제로 영화 상영은 인근 도시들에서 나누어서 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영화제를 하다니. 일정표에 저장을 해 두었다.


영화제 기간을 며칠 앞두고 프로그램을 검색해보았다. 미국 영화를 중심으로 세계 50개국의 영화를 포함한 100여 개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었다. 개막작은 벌써 매진되었으나 나머지 영화들은 예약이 가능했다. 액션, 다큐, 음식, 애니메이션 등의 다양한 영역의 장단편 영화들이 있었는데 특히 내 관심을 끈 것은 국제 영화 스포트라이트 (International Spotlight)였다. 관객으로서 영화제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성'에 있다. 지구 상에서는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지만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외국 영화는 흥행을 위주로 만들어진 미국 할리우드 영화가 대부분이다. 작품성을 위주로 한 영화 또는 유럽 영화나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의 영화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영화제는 평소에 접하지 못하던 '아웃 사이더 무비' 또는 '월드 무비'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동네 국제영화제에 나 스스로를 초대했다. 생각 같아서는 매일 저녁 한 편씩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사정상 세 편만 봤다. 영화제에서 세 편이나 영화를 본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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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포트 비치 영화제


첫 번째로 고른 작품은 미나리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스티븐 연이 출연한 신작, <The humans>였다. Stephen Karam 감독이 자신이 연출한 연극을 영화로 만든 작품인데, 추수감사절 날 블레이크(Blake) 가족이 뉴욕의 낡고 허름한 딸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이다. 스티븐 연이 출연한 영화라 선택을 했는데, 연극처럼 주로 대사로 이루어진 작품은 자막 없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우리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가진 내면의 두려움과 유약함을 잘 나타낸 것 같았다. 스티븐 연은 딸 브리짓과 동거하는 집주인 남자로 나오는데 아직 제대로 된 직업도 없고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문제가 많은 블레이크 가족들을 포용적이고 공감적인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스티븐 연이 출연한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 그리고 <미나리>를 봤다. <버닝>에서의 이미지가 강렬한데, <미나리>에서도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의 인물이라 캐릭터가 강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스티븐 연의 새로운 이미지를 본 것 같다. 비록 경제적인 능력은 별로 없어서 벽난로의 장작불 대신에 장작불 영상을 벽에 비춰줄 수밖에 없지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잘 받아주는 따뜻한 사람을 잘 연기했다.

humans-share.jpg 영화 The Humans
the humans.jpg 스티븐 연은 따뜻한 공감의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


다음날 본 두 번째 작품은 파키스탄 계 무슬림 여성 감독이 연출한 경쾌한 코미디 영화 <Americanish>였다. 엄마와 함께 사는 두 딸과 의사랑 결혼하려고 파키스탄에서 건너온 조카딸, 세 여자의 연애 이야기인데, 무척 뻔한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따르고 있고 시대에 맞지 않는 고루한 전통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편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욱이가 "대학생들이 만들어도 이것보다는 잘 만들겠다"라고 할 정도로 시대감각과 젠더에 대한 감수성이 문제가 되기는 했다. 한마디로 무슬림 여성 감독의 작품 치고는 너무 진부하고 관습적인 색채가 강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또한 오늘날 무슬림 여성들이 실제 현실에서 겪고 있는 벽을 상징한다고 생각이 되었다. 감독은 코미디를 통해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americanish.jpg 영화 Americanish 포스터
20211023_213800.jpg 영화 상영 후의 관객과의 대화


그리고 내가 세 번째로 선택한 작품은 바로 이지원 감독이 연출한 우리나라 영화 <아이들은 즐겁다>였다. 영어 제목은 <Kids are fine>이었는데, 미국에 오기 전에 TV 영화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것을 본 기억이 났다. 미국 극장에서, 그것도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를 만날 수 있다니, 저녁시간이 기다려졌다.


한국 영화 상영은 국제 스포트라이트(International Spotlight) 세션 중의 한국 스포트라이트 (Korean Spotlight) 행사로 준비된 기획이었다. 아마 코로나 상황이라서 그렇겠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서 영화 제작진이 오지는 못해서 관객과의 대화는 없었다. 대신에 이번 한국 영화 상영에 기여한 분들의 소개와 인사가 영화 전에 있었고 한국계 Tommy Kim 어바인 부시장이 한국 영화 세션 실무진 3명에게 감사장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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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Spotlight 행사 리플렛, 후원해주신 분들이 소개 되어 있다.
20211027_200022.jpg Tommy Kim 어바인(Irvine) 부시장 님이 한국영화 상영을 준비해준 스태프들에게 감사패를 주고 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곳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것은 현지 교민들의 후원과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뉴포트비치 영화제의 한국 영화 상영도 이곳의 한국 커뮤니티가 만들어 낸 전통이었다. 이분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영어가 모국어인 분들이고 미국인들이다. 실제로 극장 내에 내 주변에 앉은 분들은 거의 다 영어로 대화를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한국 커뮤니티를 지켜나가기 위해 한국 영화 상영 행사를 매년 마련하는 것이다.


자막 없이 잘 들리는 한국 영화를 이곳 극장에서 보는 기분은 좋았다. 한마디로 편안했다. 영화는 암투병 중인 엄마가 병원에 있는 초등학생 다이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웹툰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저마다 처한 아픈 상황에서도 밝게 웃으며 놀고 어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잘 그려내었다. 영화 상영 내내 극장 안에서는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몇 번을 울었다. 하지만 영화 제목처럼 아이들은 특유의 발랄함으로 슬픔을 이겨내고 자란다. 슬픈 현실과 아이들의 순수함이 묘한 대조를 일으켜서 나를 울게 한 것 같다.


우리 동네에서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행운,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를 만나는 행운을 다 누린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이들 포스터.jpg 영화 포스터
아이들은 즐겁다.jpg 아이들은 엄마에게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여기서 차를 운전하며 라디오를 들으면 BTS 노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다. K-pop에 이어 K-movie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의 여우조연상 수상 등 세계인의 관심을 더 끌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열풍이 이곳에서도 불어, 대학 캠퍼스에는 드라마에 나온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이 있을 정도다. K-movie의 세계 진출을 기대해본다.


한국 영화가 이처럼 갑자기 인기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K-movie가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현지 영화제에 한국 작품을 상영하기 위해 애쓴 이곳 한국 커뮤니티들의 숨은 노력도 조금은 기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그들은 한국에도 좋은 영화가 있다는 것을, 자신들의 재정적 기여와 노력으로 알려왔으니까 말이다. 이런 노력들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한국 영화가 해외에서도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이곳의 한국 커뮤니티는 자신들의 뿌리인 한국 문화를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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