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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 Jan 07. 2023

백만 년 만의 목욕을 완도에서

라떼의 완도살이 3 - 완도 ㅇㅇ해수 스파

나는 원래 목욕탕에 잘 가지 않는다. 어릴 적에 집에 뜨거운 물이 안 나오고 샤워를 할 수도 없었던 시기에는 2주 만에 한 번씩 일삼아 아버지를 따라갔었지만(내 나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건만 ㅠ) 온수 보일러가 있는 집에 살면서부터 샤워를 하게 되고 자연히 목욕탕에 가지 않게 된 것이다. 집에서 매일 샤워를 하는 요즘에도 흔히 사우나라 불리는 목욕탕에 자주 가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은 뜨거운 탕에 몸을 넣거나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것으로 피로를 푼다.   


3년간의 코로나는 원래 잘 안 가던 목욕탕에 아예 발길을 끊게 만들었다. 그래서 목욕탕에 가본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토요일 늦은 오후, 엊그제 삐끗한 허리에 뜨거운 찜질을 해야겠다는 이유로 정말 백만 년 만에 목욕탕에 갔다. ㅇㅇ해수 스파, 정말 바닷물이 탕에 들어있나 궁금하기도 했는데 냉탕에 머리를 담그니 정말 짭짤한 맛이 느껴졌다. 해수를 쓰는구나. 입구에 개인 목욕 바구니들을 놓는 선반이 있었는데 서울이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이라 특이했다. 완도 목욕탕은 다 이런 것인지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 

목욕탕 남탕 입구에 놓인 목욕 바구니 선반


해수 온탕이 있고 고온탕이 있었다. 먼저 온탕에서 몸을 덥힌 후 고온탕으로 넘어갔다. 아 온몸에 전해지는 뜨거움. 온몸을 담그니 전신에 열기가 전해져 온다. 고백하자면, 어릴 때 뜨거운 탕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고역이었고 들어가서도 가슴이 답답하고 뜨거워서 나오고 싶었는데, 어릴 적 그때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아직도 탕에 들어가는 게 편치 않다. 참으며 버틸 뿐, 빨리 나가고 싶다.


3~7세 정도의 아들 셋을 데리고 목욕하러 온 아빠가 있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재미있게 장난감과 물바가지를 가지고 놀았다. 목욕탕 안에 아이들 소리가 들리니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문제는 본격적인 때밀기와 비누칠의 시간이 돌아왔을 때였다. 큰 아이와 둘째 아이를 씻긴 아빠는 막내를 씻기려 했으나 막내는 막무가내로 울며불며 씻지 않으려고 때를 썼다. 목욕탕 안이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탕 안의 아저씨들은 재밌는 구경이 났다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는다. 아이의 시점으로 생각해보면 평화롭게 물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는데 아빠가 갑자기 붙잡아 끌더니 아픈 수건으로 문지르고 눈 따가운 비누칠을 무자비하게 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어찌하여 이런 고난을 내게 주십니까. 아이는 더욱 큰 소리로 운다. 그러다가 아빠의 비장의 무기가 나왔다. 

"빨리 씻어야 바나나 우유 먹으러 가지. 자꾸 말 안 들으면 바나나 우유 안 사준다."

아, 바나나 우유. 어릴 적 뜨겁고 (때를 너무 세게 밀어서) 아픈 고난의 목욕이 끝나면 개운한 기분과 함께 포상으로 주어지던 그 바나나 우유다. 물론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지만 바나나 우유 안 사준다는 말에는 강한 거부 의사를 밝힌다. 밖에 나와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는데 내 옆에 그 아버지와 막내가 있었다. 나는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질로 수고혔다."고 얘기해 주었다. 아이 아버지가 빙긋이 웃었다.


탕 한쪽에는 때 미는 침대가 있었고 그곳에서 세신사 아저씨가 양팔에 문신을 한 체격 좋은 남자의 때를 밀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면 아버지는 나와 동생의 온몸을 밀어주시고 힘이 부치신 지 본인은 세신사에게 맡겼다. 나와 동생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비싼 돈 주고 뭐 하러 때를 미냐고 잔소리를 아버지에게 퍼부었었다. 오늘 삼 형제를 데리고 목욕 온 젊은 아빠와 때 미는 모습을 보니 그때의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전화를 한 번 드렸다. 어릴 적 목욕탕 갔던 얘기는 못했다. 그냥 별일 없으시죠, 하며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길에 젊은 아버지와 세 아들이 원하는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귀가하는 것을 봤다. 막내는 드디어 원하던 바나나 우유를 들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막내는 이다음에 어른이 되더라도 목욕을 마치고 마시는 바나나 우유맛은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목욕하던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간 목욕탕에서 나도 나의 추억을 찾았다.




바나나 우유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leejuju11/220855552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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