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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 Jan 15. 2023

나답게 졌다면 그걸로 된 거야

2023 명필름 시네클럽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 영화는 평점이 9점대네.


좀처럼 먼저 영화 보기를 제안하지 않는 아내의 이 말에 나는 이 영화를 예약했다. 내가 90년대부터 들어왔던 그 슬램덩크다. 왼손은 거들뿐 같은 말도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만화책도 애니메이션도 보지 않았다. 그냥 유명한 농구 만화라고만 알고 있었다. 새로 나온 이번 작품을 보려면 전작을 조금 봐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마침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이 넷플릭스에 있었다. 시즌 1중 처음 몇 편을 보았다.


아, 이건 뭐지. 슬램덩크 팬들이 들으면 화내겠지만. 나이 들어서 본 슬램덩크 애니는 명랑 스포츠 드라마를 가장한 학원 폭력물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단순하고 과장된 캐릭터와 그림, 뻔히 예상되는 스토리라인,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것을 봐야 하나. 아내에게 얘기했다. 이거 꼭 봐야 돼? 아내가 삐졌다. 모처럼 보자고 제안한 작품을 보기도 전에 폄훼한다고 기분이 상한 것이다. 결국 일단 예매 취소.


인터넷에 올라온 짧은 예고편을 살짝 봤다. TV시리즈와 다소 결이 달랐다. 신문기사를 봤다. 만화의 주인공인 강백호의 시점이 아니라 송태섭이라는 인물의 시점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다시 영화를 예매했다.


만화는 만화였다. 사고로 형을 잃은 동생이 좌절하지 않고 농구선수로 성장하여 이뤄내는 이야기도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를 소재로 한 애니가 관객에게 이 정도의 몰입감을 준 것은 감독의 힘이다. 또한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도 인상적이다. 경기가 어렵게 끌려갈 때, 고릴라 채치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난 이미 꿈을 이뤘어." 전국제패가 꿈이자 절대적인 목표였던 팀의 주장이자 기둥인 채치수는 어느 순간 승패를 초월한 성취감을 느낀 것이다. 결승전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며 자신이 할 일은 이제 자기답게 경기하면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정대만의 독백, "채치수는 채치수, 서태웅은 서태웅, 그럼 난 뭐지?" 정대만도 자신은 자신답게 경기하면 된다는 것을 느낀다. 나답게, 최선을 다하기. 이 작품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또 하나의 메시지가 더 있다. 패스를 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의 플레이를 하던 서태웅은 자신을 마크하는 상대가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패스를 한다. 뚫을 수 없는 상대도 있고 이룰 수 없는 목표도 있다. 이럴 때는 내 옆에 있는 동료를 믿고 패스를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단순한 메시지의 울림이 크다. 우리 삶도 패스를 주고받으며 '함께' 해 나가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경기 장면 중의 하드락 사운드는 관객을 들썩이게 하고 회상 장면의 피아노 선율은 관객을 서글픔에 젖어들게 한다. 특히 하드락 사운드는 인상 깊고 강렬하다. 집에 와서 주제곡인 The Birthday의 Love Rockets를 찾아들었다.


이 애니의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마지막에 패배한 팀인 산왕공고팀을 한 번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단 한 팀을 제외하고는 모든 팀들이 최소한 한 번씩은 지게 되어 있는 게 스포츠 세계다. 지는 팀이 훨씬 많은 것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우리 모두 다 현실에서 많이 진다. 이겨서 최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답게 최선을 다하되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현실인 것이다. 져서 기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우리 모두 이기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이기는 사람보다 져야 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우린 스스로에게 승패보다는 나답게 최선을 다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간발의 차이로 지면 분하다. 때론 잠도 안 온다. 하지만 나답게 싸워서 졌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며 북산고가 지는 것으로 결말이 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감독이 이런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특별한 성취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마지막  방울의 땀까지 흘렸지만 아쉽게 지고  결과를 받아들이며  소중한 동료를 얻는 이야기도 좋지 않을까. 강백호의 숙명의 라이벌이자 앙숙인 서태웅이, 그렇게 패스를  하던 서태웅이 마지막에는 강백호에게 패스를 해준다.


질 수 있다. 다만 지더라도 나답게 지면 되는거다. 우승을 하게되는 승리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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