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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 Jul 02. 2023

그래, 삶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2023 명필름 시네클럽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일본 영화이고 여자 복서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 없이 본 영화였다. 시네클럽에 가입하면 연간 20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상반기에 많이 보지 못해서 영화 보고 점심을 먹기에 적합한 토요일 오전에 상영하는 영화를 골랐을 뿐이었다.


중간에 몇 번 졸았다. 토요일 아침에 테니스를 치고 아침을 먹고 바로 극장으로 온 데다가 감독님은 매우 담백하고 잔잔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셨다. 나중에 들으니 아내도 졸았다고 해서 나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래서 말도 할 수 없는 장애인 여자 복서의 이야기였고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쯤 되면 할리우드 서사에 익숙한 우리의 머릿속에는 스토리가 그려지게 마련이다. 장애로 힘겨운 삶을 살던 주인공이 복싱을 만나 삶의 활력과 희망을 얻게 되지만 위기를 겪게 되고 끝내 처절한 싸움 끝에 승리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감독은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져버린다. 우리의 주인공 게이코가 경기에서 승리하는 장면도 멋지지 않다. 얻어터져서 부은 눈을 들어 자신의 승리에 놀랄 뿐이고 결국 결말부에 나오는 경기에서는 자신의 장애 때문에 억울한 상황을 겪고 흥분해서 덤비다가 K.O로 캔버스에 누워버린다. 재개발 지역에서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는 권투도장은 낡아도 너무 낡아 보이고 회원수는 줄어만 간다. 관장과 트레이너들은 복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게이코의 정신적 지주인 관장은 병이 깊어만 가다가 결국 죽게 되고 체육관은 문을 닫는다. 영상과 편집도 매우 '지루하다.' 그냥 일상이 흘러가듯이 보인다. 흥미로운 플롯도 없고 화려한 장면도 없다. 나중에 찾아보니 16mm 필름으로 찍었다. 쇠락하고 낡은 영화의 공간들에 어울리기 위한 감독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남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보이는 흐르는 강물과 도시의 모습이 마치 "그래, 삶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쇠락한 도시 변두리의 쇠락해 가는 복싱 체육관, 그리고 늙고 병들어가는 관장, 장애를 가지고 힘들게 일하며 힘들게 운동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 삶은 각자의 투쟁으로 힘겹고 궁극적으로 쇠락해 가며 끝내 소멸하는 것임을 나타내준다. 


나는 늘 영화를 본 후 아내의 소감을 묻는데 아내는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사 때나 귀가 길에 별로 언급을 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를 만나면 '내 취향 아니야.' 한마디로 끝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함께 본 아내에게 귀갓길에 조심스럽게 소감을 물었더니 아내가 말했다. 

"영화는 졸렸는데 중간중간 빛나는 장면들이 숨어있어. 감독이 예사롭지 않아."

 결말부에서 경기에 진 주인공이 상대선수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상대선수도 작업복을 입고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에 얼굴이 부어있는 장면이 좋았다고 했다. 나도 그 장면이 좋았다. 주인공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상대선수는 투쟁의 대상, 때로는 악마화되기도 하는데, 이 장면에서 보이는 상대 선수는 그녀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느껴진다. 나도 게이코가 경기에서 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좋았다. 자신을 늘 격려하며 지켜봐 주던 관장은 돌아가시고 체육관도 없어졌지만 상대 선수를 만난 게이코는 다시 힘을 내고 뛴다. 그녀의 삶이 이번의 패배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내가 감독을 극찬한 또 하나의 장면은 게이코가 농인 친구들과 카페에서 수화로 얘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아무런 자막도 없어서 관객은 그저 그녀들의 표정과 수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내는 게이코가 비장애인들의 대화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듯이 우리도 그녀들의 수화를 그저 바라보는 장면을 넣은 감독이 대단하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미야케 쇼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영어 제목이 Small, slow but steady라는 것도 뒤에 알았다. 원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사람들 간의 관심과 소통의 이미지를 준다면, 영어 제목은 게이코의 삶이 꾸준히 이어질 거라는 느낌을 준다. 관장은 아침 운동에서, 체육관에서 게이코를 지켜봐 준다. 수화와 필화를 넘어서 두 사람은 눈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눈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또 하나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극 중에서 흑인 혼혈인 케이코 남동생의 여자 친구 하나는 서툰 수화로 인사하고 게이코를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게이코에서 알려준다. 세상과 많은 부분 단절된 게이코에게 다가가려는 작은 몸짓과 눈빛을 그 장면에서 느끼게 된다.


졸렸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었다. 영화를 반추해 보는 지금, 나도 위안을 받았다. 영화 마지막의 흐르는 강물처럼 삶은 그렇게 그냥 흘러간다.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다. 그 삶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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