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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기관사 ㅇㅇㅇ을 긴급 수배합니다

긴 출퇴근에 지친 승객들을 위로해주는 서해선 기관사의 방송 멘트

by 라떼

23년도에 일산에서 부천 소사역까지 연결되어 안산 반월공단까지 가는 서해선은 앞으로 서해안을 따라 충남 지역까지 뚫릴 예정이다. 김포공항에서 종점인 원시역까지의 구간은 지하 구간인데, 유일하게 시흥시청역 부근에 이르면 지상으로 나오는 구간이 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긴 시간을 타고 가는 나는 책을 펼쳐들지만 이내 꾸벅꾸벅 졸며 비몽사몽이었다. 아침 출근 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피곤하다. 그때 그 기관사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나는 눈을 떴다.

"지금 창 밖을 한 번 바라보세요. 그리고 눈부신 아침 햇살을 느껴보시고 좋은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고개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전동차는 유일한 지상 구간으로 나와 달리고 아침 햇살을 받은 초봄의 들녘이 펼쳐졌다.


그 당시 나는 연초에 새로 발령받은 부서의 일로 힘들고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출근길도 멀어 캄캄할 때 집을 나서서 한시간 이상 전철을 타야 했다. 날은 추웠고 지하를 달리는 전철의 창도 늘 캄캄했으며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색 외투를 입고 몸을 웅크렸다. 졸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깨지만 곧 또 졸았다. 졸아도 졸아도 내릴 때가 되면 피곤했다.


기관사의 방송 멘트 덕분에 잠에서 깨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고 있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다시 살아났다. 회사일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함께 하는 동료들과 마음을 모아 하나씩 대처해나갔다. 그 후에도 출근길에 그 지상 구간을 지나면 늘 기관사의 방송을 떠올렸다.


어느날 퇴근길에 전철 종점에서 내리려는데 기관사의 방송이 나왔다. 종점에서는 늘 이 전동차는 더 이상 운행하지 않으니 한 분도 빠짐없이 하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방송이 나온다. 어떤 기관사는 차내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거나 하면 짜증섞인 큰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목소리가 달랐다. 창 밖을 바라보라고 하던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기관사였다.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근심, 걱정만 다 내려놓으시고 잊으신 물건이 없도록 가지고 계신 소지품은 다 가지고 내리시기 바랍니다."

뭐 어찌 보면 별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근심, 걱정은 다 내려놓고 가라는 말에 내 마음이 울컥했다. 기관사의 멘트가 나를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내 심정이 그랬다.


다음날 퇴근 길에 전철을 타기 전에 역무실을 찾아가서 전날 여기서 몇시에 출발한 전철을 운행한 기관사를 알 수 있냐고 물었다. 서해선 운영은 별도의 회사에서 하고 기관사들만 코레일 소속인데 역무원들은 서해선 운영회사 소속이라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름을 알수없는 낭만 기관사 ㅇㅇㅇ님. 아마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시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자면,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실 수도 있고. 이미 브런치나 다른 글쓰기 공간에 글을 연재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멋진 목소리로 들려주는 격려와 응원의 말에 지친 출퇴근 길에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으니 앞으로도 멋진 방송 멘트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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