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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 사장님은 러키비키를 모르신다

더 이상 붕어빵 팥 vs 슈크림 논쟁은 없다

by 라떼

추운 겨울날, 한 시간 이상 전철안에서 시달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붕어빵 노점을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는가. 이번 겨울에 우리 동네에도 드디어 붕어빵 노점이 생겼다. 전철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릴 때면 붕어빵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갓 구워 뜨거운 붕어빵이 담긴 봉투를 받아 들고 집으로 가는 짧은 시간동안, 참지 못하고 그 중 하나를 집어들어 먹으며 간다. 갓 구운 붕어빵은 겉이 바삭하다(그래서 많이 사서 두었다 먹으면 안된다). 속에 든 팥앙금이 뜨거워 후후 불면서 먹으면서 걷는 길에서 나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우리 동네 붕어빵이 맛있는 이유가 있다. 팥이 몸통 부분만이 아니라 머리부터 꼬리까지 많이 들어있다.

'꼬리까지 맛있어요'

내가 광고문구를 쓴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사장님께 꼬리까지 팥이 많이 들어서 맛있다고 얘기를 했다. (나를 포함해서 아재와 아짐들은 가게 주인 아저씨나 아줌마와 대화하기를 즐겨한다. 가끔은 길에서 모르는 사람들과도 오지랖 넓게 얘기를 나눈다).

"재료 아껴서 뭐하겠어요."

KakaoTalk_20250128_100300704_05.jpg 보라 머리끝에서 꼬리까지 가득 찬 팥을


날씨가 추워지면서 붕어빵의 인기가 날로 높아졌다. 전철역에서 내려 신호등 횡단보도를 건널때 빠른 걸음으로 가지 않으면 옆의 젊은 경쟁자들이 앞서가서 먼저 주문을 해버리기도 했다. 두 세 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보통이다. 구워놓은 붕어빵이 많이 있으면 내 차례가 바로 오기도 하지만 내 앞에서 구워놓은 빵이 다 팔리면 꽤 기다려야 한다. 새로 빵틀에 반죽을 부어 구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50128_100300704_02.jpg 왼쪽 열이 팥 오른쪽 열이 슈크림


지난 번에도 내 앞에서 구워놓은 빵이 다 팔려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사장님은 미리 구워놓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러키비키 원영적 사고를 하기로 하고 멋지게 날린 나의 대사는 이러했다.

"괜찮아요. 대신에 저는 갓 구운 붕어빵을 먹을 수 있잖아요."

사장님이 웃으며 러키비키죠, 하셨으면 이날의 대화는 멋지게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의 반응은 이러했다.

"아...예 그렇죠."

러키비키를 모르시나. 빵 굽느라 바빠서 그러실 수도 있지. 갓 구워 뜨거운 붕어빵을 한 입 베어물고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다음 번에는 회식을 마치고 평소보다 늦은 9시쯤 귀가하며 붕어빵을 사러갔는데 내 앞에 여자 손님 한 분밖에 안계셨고 빵틀 위에 올려놓은 붕어빵의 갯수가 충분해보여서 내 차례까지 오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아뿔싸, 여자 손님은 붕어빵을 많이 사갔고 남아 있는 나머지 붕어빵도 온통 슈크림으로 밝혀졌다 (붕어빵은 역시 팥이다. 기본에 충실하자). 사장님은 이번에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늦은 시간에는 미리 구워놨다가 안 팔리는 경우가 많아 조금씩만 구워놓는다고 하셨다. 시간도 늦고 추워서 약간 좌절했지만 나는 또 러키비키 원영적 사고를 보여주기로 했다. 이번에 사장님이 잘 반응해주시기를 바라며(나는 사무실에서도 아재개그를 반응이 없어도 계속 시도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대신에 저는 갓 구운 붕어빵을 먹을 수 있잖아요. 붕어빵은 역시 갓 구웠을 때가 맛있죠."

새로 반죽을 빵틀에 부으며 사장님은 그냥 또 이러셨다.

"그래요."

끝, 더 이상의 말씀이 없으셨다. 아 사장님은 러키비키를 모르신다.


어제 저녁에 아내와 외출했다가 귀가하는데 설 연휴인데도 붕어빵 가게가 문을 열고 있었다. 앞에 두 명이나 기다리고 있어서 아내를 먼저 집으로 보내고 내가 붕어빵을 기다렸다. 관심이 1도 안 가는 슈크림 붕어빵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내 앞의 아주머니가 다 사가시길래 웃으며 슈크림을 좋아하시나 봐요. 무심코 말을 했는데(아 이 오지랖을 어떡한단 말인가) 아주머니가 좀 당황하시는 표정을 지었고(아마 어떻게 슈크림을 사 갈 수가 있어요 같은 숨은 뉘앙스가 내 표정을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분위기가 좀 이상해지려는 찰나 사장님이 재빠르게 끼어드셨다.

"집에 아이들이 슈크림을 좋아하죠."

나는 아 그렇죠, 하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붕어빵 봉투를 받아들고 가셨고 나는 집에 아이들 주려고 사가시나 보다고 사장님께 말했다. 그때 사장님이 말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거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붕어빵은 당연히 팥이고 슈크림은 아이들이나 먹는 거라고 생각하는 나의 편견이, 아주머니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고 어쩌면 살짝 놀리는 것으로 들렸을 수도 있는 부주의한 내 말이.


우리 동네 붕어빵 사장님은 러키비키를 확실히 모르신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붕어빵은 팥이 아니라 슈크림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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