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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잊어버린 아버지

어눌한 말, 선택적인 인지, 두꺼운 두 손이 떨던 그날

by SHOOT

어느 때와 같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어깨 결림과 머릿속의 뿌연 두통이 함께 하고 있다. 지난 수요일 저녁 급작스러운 통화한 통으로 시작된 긴장의 풀림 여파가 지금까지 오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요가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요가라고 하여 정적이고 크게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보다 약간의 강도가 있는 수업이었다. 남편도 나를 기다리면서 헬스장에서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한 시간 한 상태로 우리는 복도에서 만나 신발을 갈아 신고 있었다. 새로운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감회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부풀어 있을 때 무심히 살펴본 본 전화기에는 큰언니와 작은 언니의 전화번호가 찍혀있었다.


두 사람다 같은 용건으로 전화한 것이겠거니라는 순간의 생각으로 가장 상단에 있는 큰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그 언니는 통화가 가능하냐는 질문과 함께 지금 당장 친정집으로 가라는 말을 했다. 힘을 써야 할 수도 있으니, 남편과 함께 이동할 수 있으면 함께 해달라는 말에 의아함이 스칠 때쯤, 아버지가 말을 어눌하게 하신다고 119에 전화를 하라고 엄마에게 전한 상태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즉시, 더 이상 어떻게 더 아픈 건지,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묻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이제는 빠르게 움직여야 할 뿐이라는 판단에 남편에게 다급히 상황을 말하고 운동을 하고 나서 씻지도 못한 상태로 다급히 친정집으로 향했다.


남편은 말이 어눌하다는 아버지의 상태를 듣고, 뇌경색을 의심했다. 뇌경색, 뇌졸중 숱하게 들은 말들이지만, 이것의 전조증상에 대한 지식도 없거니와 은연중에 우리의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적이 없었다. 남편의 아버지 그러니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살아생전에 항암치료를 하다가 돌아가신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 와중에 뇌졸중에 왔었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마지막 장인어른은 뇌졸중 증상도 와서 언어능력을 상실하시곤 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뇌졸중이면 어떻게 하나라는 마음이 스칠 때면 눈물이 고였다.


조금씩 눈물이 고인다. 어제 선거 투표날 공휴일이라고 친정에 가서 아버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두꺼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리셨다. 두 손에서 느껴지는 손가락의 두께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을, 고된 일을 한평생 했는지 온 얼굴에서 느껴졌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중요한 대통령 개표에 앞서 내가 귀찮은 듯 가라는 제스처를 취하신다. 그게 바로 어제의 모습인데, 갑자기 허공을 향해 호박잎이 잘 폈다. 고춧대가 쓰러졌다. 말을 하고, 경찰을 못 알아본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쿵하고 내린다. 젊어서의 아빠가 한 행동들을 되돌아 생각해 보면 못된 짓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어린 나이 서울로 올라와서 한평생 고생만 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기에 온전히 미워하기만은 할 수 없다. 그렇게 살았기에 내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친정집 근처 역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들어가야 할 병원을 찾기 못한 상태로 119구급차에 있었고, 우리들은 어머니의 전화를 기다리며 집에서 대기했다. 의료체계가 무너진 지 꽤 되었는데, 그 여파여서 일까 아버지는 응급차 안에서 30분 이상을 이동하지 못한 채 대기를 한 것 같았았다. 다행히 집에 도착했을 때는 병원이 정해졌고,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병원을 향해간다는 말에 친정집에 모인 작은언니네 부부와 함 숨을 돌리며, 화장실을 들리고 생수를 챙기고 잠깐의 채비를 갖춘 뒤 다시 병원으로 이동하였다.


작은언니와는 자라서는 서로 앙숙처럼 안 맞아했다. 물론, 지금도 맞지 않다. 그런데, 자매라는 것. 피로 얽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이 위험한 순간에 그리고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사는 우리 둘. 언니를 보았을 때 순간의 안도감은 컸다. 큰 일을 혼자 겪을 세상의 모든 내가 자라면서 부러웠던 외동들이 오늘은 부럽지가 않다. 언제고 맞이하는 이 순간에 그들은 폭풍 같은 후원과 찬란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혼자 그 찬란함만큼이나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말하고 나니, 저주 같기도 하지만 중학교 졸업앨범 나의 장래희망은 외동딸이라고 적을 만큼, 사랑을 온전히 나의 것인 양 누리며 자라고 싶었다.


달려가는 차 안에서, 우리들은 각자 들었던 이야기와 상황들을 추리며 그저 뇌경색이 아니기를 바라며 도착한 응급실. 빠르게 움직였다곤 하지만 함께 이동한 것이 아니고 보호자는 1명만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우리들은 또다시 밖에서 대기를 해야만 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병원이라 시설이 깨끗하고 응급실은 생각보다 한 석하여 병원자체내에서는 그래도 비교적 빠르게 응급 처치를 받지 않았을까 희망적인 사고를 돌린다. 밖에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돌아갈지 몰라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가 입원을 해야 할 경우, 그리고 외래를 해야 할 경우, 누가 밥을 새고, 또 누가 외래진료 시 방문을 할지에 각자의 직장거리까지 고려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모인 4명 중 상황판단이 가장 느린 나는 그저 한 템포씩 늦게 파악하였다.


입원이나 밤을 새우는 것에 대한 대비는 작은 언니가 하여, 엄마와 손을 바꾸고, 엄마와 함께 나는 친정집으로 가서 엄마를 살피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외래진료를 하게 될 경우는 내가 반차를 써서 오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며칠 전 늦잠으로 급작스러운 반차를 쓴 것이 무척이나 마음이 쓰였지만, 상황이 이런 것은 어찌하겠는가.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지라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더욱이 엄마집에서 회사를 출퇴근하기에 더 좋은 나는 그런 방향으로 정하였고, 우리 집으로 다시 이동을 하여 몇 박 머무를 옷을 챙겨 왔다. 이러저러한 것을 챙겨 다시 왔다. 다행히 mri와 소변 그리고 혈액검사에서 이상이 없었고, 외과진료 선생님이 와서 뇌척수액 검사 진행을 말해서 그렇기 진행하기로 하였다. 다만, 이것은 6시간 이상의 회복시간이 필요하기에 엄마는 해산선포를 하듯 우리에게 6시간이나 있어야 하니 집으로 가라고 한다.


mri에 이상이 없다는 말에 그나마의 안도감을 가지고 다 함께 친정집으로 간다. 작은언니는 바로 뇌척수액 검사결과가 나오면 확인을 받기 위해 바로 출근을 하지 않고 병원을 갔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연차 씀에 대해서 멋있음을 느꼈다. 물론, 이는 작은 형부가 중간에서 손을 바꾸어 아빠를 돌봐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은 형부가 일을 안 해서 혹은 못해서 여하튼, 출근을 하지 않은 기간이 꽤 되어 늘 작은 언니네 먹고 나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는데, 이런 큰 일에 여유 있는 손이 있다는 것이 또 불행 중 다행인 것처럼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할까 봐 신경을 써주는 것까지 그날 나는 회사로 무사히 출근을 하였다.


출근을 하는 동안에 다행히 뇌척수액 검사도 좋다는 의견을 받았다. 점심시간 동료들에게 컨디션이 안 좋아서 쉬겠다고 이야기를 하곤 간단한 식사 후 회사사무실 의자를 붙여서 쪽잠을 잤다. 퇴근 15분 전에도 급급하게 쿠폰을 써서 회사로 스타벅스 딜리버리를 주문하여 저녁식사거리를 준비했다. 회사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에 도보시간이 꽤 있어서 길을 가면서 먹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주문을 하면서 1인분을 추가 주문하여 챙겨갔다. 남편도 그날 함께 새벽같이 이동을 하고, 지금 집에서 평택으로 출퇴근을 하는데 끼니를 알아서 잘 해결해주고 있음에도 감사함이 생긴다.


그리고 도착한 병원 그제야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평온한 한 잠을 자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분명 어제 저 두툼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얼러 만져주셨는데, 지금은 링거를 꼽고 아직 신경이 불안한지 손은 자꾸만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고 떠신다. 잠깐 눈을 떠 내 얼굴을 확인하시고 몇 마디를 나누었다. 만나자마자 내가 한 소리는 어쩌면 잔소리이다. 서울에 살아야 한다. 시골에 내려가시면 안 된다. 바로 병원에 오려면, 그리고 자식들이 병원에 쉽게 접근하려면 서울 병원이어야 한다고 당부를 한다. 아버지는 귀찮은 소식을 들은 것처럼 다시 잠을 청하신다. 새벽 5시가 넘도록 몸을 가늘지 못하고 힘을 쓰며 응급실에서 때쟁을 썼을 몸이 이제야 피곤이 오는 것이겠거니 한다.


곧이어 엄마와 잠깐 탕비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남동생이 왔다. 남동생은 대전에서 5시에 퇴근하자마자 차를 끌고 왔지만 8시 반이 돼서야 도착하였다. 바로 와서 인지 남동생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약간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언젠고 이런 날이 있을 것이었던 것처럼 태연하기도 한 이중적인 모습으로 엄마와 손을 바꾸었다. 보호자를 남동생으로 바꾸고 나서 남편도 다시 한번 병원에 방문하였지만, 아버지를 깨우지는 못한 채 우리 집으로 이동하였다. 내 욕심에는 어제 새벽 함께 고생한 우리 남편도 아버지의 두 눈동자에 각인시키고 싶었지만, 남동생은 아버지를 자꾸 깨우는 것도 불편한지 그저 아버지의 곤히 잠자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그렇게 남편은 또다시 나와 엄마를 친정집에 떨구고 갔다.


엄마는 참 강한 사람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나의 걱정과 불안이 오히려 증폭될 까봐. 혹은 애상감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의료 판단이 더 우선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상황이 정리되면 전화할 께. 끊어! 그에 비해 나는 가장 상황판단이 느린 아이처럼 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되고 집으로 가는 길 갑작스레 나는 내 남편도 그렇게 되면 나는 할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엄마처럼 강한 사람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가 도와줄게. 엄마는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신다. 나는 그 먼 미래에 엄마도 없이 내 혼자 일 거라는 생각에 그런 말을 한 건데, 엄마는 당연하게 도와준다는 말에 그저 다시 한번 엄마의 단단함과 따뜻함에 놀라울 뿐이었다.


엄마는 아빠한테 잘해준 것 같은데, 못한 것만 생각이 난다고 한다. 아빠는 잠깐 이야기를 했을 때도, 일을 나가야 하는데라고 말을 하며 일자리 걱정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돈을 안 벌어오고 집에서 밥만 잘 먹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이번에 이렇게 된 걸 보니, 치매가 걸리면 어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을 안 해도 좋으니 집에서 안 아프고 놀면 좋겠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일자리를 걱정하는 아빠와 일을 안 해도 좋으니 더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엄마. 나는 꽤나 다복한 다정한 집안의 자녀인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렇게 훈훈하게 일기의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정밀 mri 검사 의견도 깨끗하다는 의견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초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수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긴 하루가 끊임 났다. 토요일 아침부터 이제야 내 집살림을 정리한다. 공휴일이 껴 있음에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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