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절제의 기쁨
내일이면 긴 여름휴가가 끝나고, 출근을 한다. 일이 밀려있을 거라는 걱정과는 반대로, '그래해버리면 되지'라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 꽤나 충전이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일이 많을 때가 있었던 것과 반대로 이번 여행은 다행히도 일이 딱 끊겼을 때였다. 회사는 다행스럽게도 나를 찾지 않았고, 외주자들도 나를 찾지 않았다. 노트북을 안 들고 여행이나 친정집을 가본 적은 거의 1년 만인 것 같다. 양가방문을 할 때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 한쪽구석에 늘 노트북을 챙겨 방문을 했었다. 이번에는 애초에 어떤 다짐이라도 하듯 노트북을 안 가져갔고, 노트북을 켤 일도 없었다.
물론, 여행의 첫날부터 툴툴 털어버리지는 못했다. 무려 3박 4일이라는 여행에서 이틀 동안 회사 꿈을 꾸었으니 말이다. 평소의 나는 잘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를 나름 꽉꽉 채운다. 출퇴근 시간이 1시간 20분이나 되면서, 보상심리로 어떻게 집에서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다룰까라는 약간의 강박적인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서는 같은 하루인데도 나의 기쁨, 나의 여흥을 위해 온전히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의 버튼의 성이 효율성에서 재충전으로 바뀌면서, 충만함이 느꼈다. 눈이 떠지는 시간에 일어나 맛집을 찾아가고 쇼핑을 하고 무더위를 피해 다시 숙소에 들어와 낮잠을 잔다는 선택지를 누리고, 야경을 마음껏 보고도 다음날의 기상을 걱정 안 해도 되는 무절제의 기쁨.
여행의 계획을 짜는 이마저도 지칠 때 다행히도 남편이 든든하게도 열심히 먹거리와 방문할 곳들을 찾았다. 남편은 계획이 없어도 즉흥적으로 계획을 짜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타입이다. 그보다는 그 순간의 나의 컨디션이나 먹고 싶은 것에 따라 유동적으로 짜기도 하는 편이다. 나와는 정반대다. 여행을 가기 전부터 먹거리, 살 것, 등등을 구글 맵에 찾아 기록하여 잘 짜인 계획을 어느 정도 들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갑작스러운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큰 결심이었고, 또 그 이후의 일에는 남편에게 거의 전적으로 위임하여 진행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계획을 짜기로 마음을 먹는 다면, 결국 스스로 최고 상태였을 때의 계획 수준과 비교하여 또 이것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력이 되는 데까지만 보았고, 전적으로 위임을 하였다. 남편의 든든함을 느낄 때였다. 언제고 내가 힘들 때면 이 사람은 이 정도로 일을 잘 처리해 주겠거니라는 막연한 신뢰가 생겼다.
오히려 즉흥적으로 갔기에 여행을 하는 동안, 미래 계획을 짜야지라는 바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수많은 질문들을 틈틈이 안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와는 다르게 오히려 일본인들의 삶을 더 들여다보게 된 것 같다. 이렇게 1년에 한 번 길게 여행을 가는 것도 꽤나 괜찮은 방법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자인팀 인원이 많기에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해당부서에 인원이 많다는 것은 나를 백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나 홀로 디자이너일 경우, 연차는 그저 나의 일을 뒤로 미루는 형태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우티 팀원들에 대한 고마움이 생겼다. 그리고 그 마음이 보니, 내가 마음이 꽤나 회복되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사실 관광기념품을 사러 방문한 곳에서 남편은 회사 팀원들에게 줄 간식거리는 안 사가냐고 물었고, 나는 왜 사가냐고 그랬다. 내가 일본을 갔다 온 사실은 우리 팀원들은 모른다. 그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그럴 만큼 회사는 나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고 돌아와서 일을 해야 하는 사실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기에 굳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떠나고 싶었다. 회사를, 그러니 그곳의 사람들이 내 마음에 어떤 받침도 되지 못했다.
온전히 회사나 팀장님의 업무 분배로 인한 자본주의 사회의 차가움을 느낀 바는 바뀌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가끔은 존재자체로 든든해진다. 그리고 디자이너라는 직무는 더욱 그런 것 같다. 늘 평가받는 위치에서 서로 크게 도와줄 수 없는 직무. 오늘 다시 팀원들을 위한 간식을 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