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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o Aug 03. 2020

알베르 카뮈 <이방인>

2018년 10월 31일 독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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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이방인>을 읽었다. 새로이 시작한 북클럽에서 지정한 책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나는 평생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고전’이라고 추종하는 것들을 일단 의심하는 경향이 나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책들에 여러번 속았다. 또한, 고전보다 지금 나오고 있는 가독성 높은 작품들에서 더 큰 울림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다름 아닌 내가 이방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태양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그 유명한 인물, 뫼르소를 만나보았다.


<이방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1부는 어머니의 사망과 장례, 2부는 우발적인 살인과 재판을 각각 핵심사건으로 삼는다. 뛰어난 창작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방인>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주제의식을 향해 내달린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뫼르소가 보였던 냉담함은, 이후 살인사건 피고인 뫼르소에게 참수형을 구형하는 검사의 주요 논거로 사용된다. 변호사는 대중의 온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뫼르소에게 선한 거짓말을 제안했지만,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둥 사람들의 오해를 빚는 발언을 일삼으며 한 치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은 뫼르소는 결국 사형 선고를 받는다.


뫼르소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그것과 닮아있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신념을 가졌다는 소위 ‘괘씸죄’의 혐의로 가중처벌을 받았으며, 사형 집행으로부터 도망칠 길이 있었음에도 죽음을 ‘선택’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폴리스로 망명할 수 있었고, 뫼르소는 1심판결에 불복하고 항소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죽음을 자처하면서까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은 서로 달랐다. 소크라테스는 본인이 폴리스의 결정에 불복할 경우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질 것을 우려했고, 뫼르소는 비록 그 결과가 죽음이라고 해도 공동체의 해석에 순응하고 싶지 않아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으로 공동체를 지지했다면, 뫼르소는 죽음을 통해 공동체로부터 개인을 지킨 셈이다.


소크라테스와 뫼르소, 둘의 ‘순교’는 모두 숭고하다. 하지만 뫼르소의 경우는 아무래도 찜찜하다. 여론에 호도되지 않고, 관습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뫼르소는 분명 대단한 이성을 가진 존재다. 그러나 그는 솔직함을 방패로 연인 마리에게 상처를 줬고, 레몽의 악행을 방관하며 피해자를 만들었고, 무엇보다 이유가 어쨌건 간에 그는 한 생명을 앗아갔다. 뫼르소의 시선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에 이입해 부당한 판결을 겪으면서 뫼르소를 동정하게끔 하지만, 뫼르소의 감상을 제하고 그의 행위만 나열해 보면 그는 여느 소설의 악당과 비슷해 보인다.


<이방인>이 사랑을 받자, <이방인>에서 모티프를 얻은 <뫼르소 살인사건>이라는 소설이 등장했다. 뫼르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랍인’의 가족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여럿 있구나-싶어 약간 웃었다. <이방인>을 통해 집단주의에 대한 경계의식이 생기는 건 환영이지만, 뫼르소를 이상적 인간으로 삼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뫼르소의 ‘모르쇠’에는 자폐적인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니 우리 중학교 2학년을 수료한 자에게만 이 책을 읽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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