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주는 이야기

2022. 9. 4. 21:35

by 가보리다


" 엄마, 엄마는 왜 아기를 낳았어?

나는 결혼은 하더라도 아기는 안 낳을 거야. 아프잖아. 힘들잖아. 그런데 왜 낳았어?"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큰 아이가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9월 초는 큰 아이의 생일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큰 아이는 생일 선물로 여행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매해 아이의 생일이 있는 9월 초에는 짧게 여행을 다녀옵니다.
올해도 늘 그렇듯이 서울 근교 좋은 숙소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응이 시큰둥 합니다.
학원 수업을 다 끝내고, 밤늦게 출발해서, 숙소에서 겨우 잠만 자고 왔으니, 심통이 날 만도 하지요. 그저 낯선 숙소에서 하룻밤 잠만 자는 것에 의미를 두려고 했는데, 침대 매트리스도 불편해서, 아침에 일어나니 몸도 찌뿌둥하다네요.
모처럼의 외식인 아침식사도, 그저 흔한 백반집 같았고, 비마저 청승맞게 내려서 여행 같은 기분도 안 들었나 봅니다. 일요일 오후에 아이 학원 보강이 잡혀 있어서, 아침식사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를 안 낳을 거라는 말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큰 아이나, 둘째 아이나 애 낳을 때 죽을 수도 있다며? 하며 결혼하더라도 아이는 안 낳을 거란 이야기를 종종 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도 안 하려고 드는데, 그래도 결혼은 하겠다는군? 하고 그냥 웃어넘깁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랑은 주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을 하고 있었죠. (우리 가족은 아주 자주 일상과 상관없는 철학적인 소재들을 이야기합니다. 큰 아이는 이런 시간을 좋아합니다.)​


"아이를 꼭 낳아야 해? 엄마 말처럼 사랑을 주는 것이 삶의 의미일 수 있어. 그게 꼭 아기일 필요는 없잖아? 남편이랑 평생 행복하게 잘 살 수도 있고, 강아지를 키울 수도 있잖아. 그런데 엄마는 언제 아기를 가져야겠다고 '결심' 했어?​


"언제라고 결심한 적 없었어.
그냥, 아빠와 결혼하고 자연스럽게 너를 가진 거야.
음.. 엄마는 너랑 네 동생을 낳은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살면서 두 번, 큰 변화를 겪었는데, 그중 하나가 너를 낳았을 때고,
두 번째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어.
남자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다고 사는 게 많이 달라지진 않아. 책임감이 생기고, 조금 더 피곤하다 정도... 그런데, 여자는 아이를 낳고 돌보게 되면, 일상이 송두리째 달라지지. 갓난 아이는 엄마가 젓을 주기 전까지는 굶을 수밖에 없어.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주기 전까지는 울고 있을 수밖에 없어. 너네들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될 때까지는 엄마가 너희 준비물 챙기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신경 써야 했지. 오죽하면,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만들었다고 했겠니.

아이를 낳기 전과 후는, 마치 매미 유충과 매미처럼 아주 다른 삶을 살게 해.
매미는 성충이 되어 지상에 올라올 때까지 7년이나 걸린데.
그런데 땅 위에 올라와서는 단 일주일 화려하게 울다가 생을 마치지.
어떤 매미 유충은 깜깜한 땅속에서 17년이나 있었다고도 해. 17년의 유충 생활과 1주일의 성충 기간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더 매미의 본질일 것 같니?"​


아이는 17년보다 더 오래 유충 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대답하더군요. 굳이 땅 위로 올라가야 하냐고요.​


"네 말도 맞아. 그런데 엄마는 매미처럼 땅 위로 올라가 본 거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딸들을 낳았지. 후회하지 않아. 엄마가 그토록 찾던 인생의 본 의미를 찾은 것 같아.
매미도 그래서 하늘 위를 날았을 거야. 자신을 닮은 알을 품으면서 세상에 나온 의미를 찾았을 거야. 자신을 닮은 자손을 남기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매미 유충은 땅속에 20년이 넘게 있어도, 결코 매미의 본질일 수가 없지."​


이야기를 마쳤을 무렵, 큰 아이와 둘째 아이는 휴대폰을 보며 딴짓을 하고 있더군요.
딴에는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에게는 아직 와닿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도 엄마는 너희들을 가진 것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말했을 때엔 조금 감동받은 것처럼 보이긴 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성숙한 어른이 되도록 한발 뒤로 물러나는 연습 중이라고,
100% 가득 차 있던 육아의 삶에서 50%를 비워내고 있는 중이라고
너희들이 온전한 어른이 되어 너희만의 행성을 만들고 나면, 그저 함께 늙어가는 인생 선배로만 남을 거라는 말을.. 차마 다 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먼 이야기처럼 보이고,
아직은 엄마의 잔소리가 필요해 보이고,
아직은...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난 빈자리를 채울 무언가를 찾지 못해서요.


집에 돌아와서 아이는 학원 보강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전날 인터넷으로 주문한 대구 뭉티기 육회를 맛있게 먹었지요.
"이게 여행 다녀 온 것보다 좋네."


아이는 하루 하루 달라져 갑니다.
더 이상 엄마가 알던 그때 그 딸이 아닐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저도 매일 준비를 합니다. 제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파워블로거가 되고 싶은 것인지, 단지 외로워서 소통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마음속에 가득 찬 이야기를 다 풀어내면,
그때 그 길을 이미 찾은 것인지...


<비가 많이 내리는 9월 첫 일요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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