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2022. 9. 2. 23:34

by 가보리다


1.


사춘기 딸에게 '지시'하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열공모드를 약속했던 아이가 스터디 카페 간지 한 시간 만에 집에 돌아왔다.
휴대폰을 가져가면 공부에 방해된다며, 호기롭게 엄마에게 맡기고 나가더니,
두고 간 휴대폰이 눈에 밟혀서
도리어 공부에 방해가 되었나 보다.​


휴대폰은 곱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라도 열공하라고 '지시'했다.
휴대폰이 빼앗겨 억울한 아이는,
한참을 엄마 앞에서 무논리로 시위를 하고 있다.


아니 왜!
왜 안되는 건데?
엄만 왜 그렇게 예민해?


안다.
사춘기 딸에게
휴대폰을 뺏는 것은 가혹하다.


나도 내가 왜 뺏었는지
이제는 헷갈린다.
아이 때문인가,​
아니면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아이에게 내리는 처벌인 것인가..​


2.


아인슈타인은 소년 시절에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며 지냈다고 한다. 임마누엘 칸트의 책을 읽으며, 파비아 대학 강의를 청강만 했다고 한다. 시험도 안치고, 그저 재미 삼아 왔다 갔다만 하니 얼마나 여유로웠겠나..​
심지어 아인슈타인조차 '비움'에서 인류 최대의 발견을 했는데, 나의 사춘기 딸 또한 비움이 필요하겠지.
지금이 딸에게 비움의 시간인지, 채움의 시간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다시 나의 문제이다.


휴대폰을 압수해서 벌을 내렸으니,
싹 잊고 내 할 일을 하면 될 텐데,​
또 불안이 밀려온다.
이 꼴로 가다간 또 중간고사 망칠 텐데..​



3.


만일..
나에게 하루 한편씩 꼭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세요. 꼭 이 책을 읽고 후기를 적으셔요.라고 누군가 강요를 한다면,
아마, 나! 안 해!
하고 진작 때려치웠을 것이다.​


보는 사람 몇 없어도, 나도
'내가 원하는 생각'을,
'내 시간 날 때' 쓰고 싶다.
물론, ' 내일까지 완성 조건 백만 원 드릴게요!'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눈앞에 당근이 있는데 안 움직이는 말이 어디 있으랴.
아이가 휴대폰만 찾고 있는 이유는, 눈앞에 당근이 없어서 일지도.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아서인지도.​
제 눈앞에 불길이 보이면, 지도 뭔가는 하겠지.


그럼에도 괘씸하다.
휴대폰 압수의 처벌 쾌감으로도 부족하다.
오늘은 엄마의 자기반성이 쉽지 않다.

....​

2026.2월9일 빨간펜
이 때 누구에게 화가 났었는지 기억해내려고 했는데 가물가물하다. 휴대폰 가지고는, 중3 큰딸과도, 초6 둘째와도 매일 싸웠으니까.중간고사를 언급했고, 사진 속 휴대폰이 큰애꺼인 걸보니, 이 이야기속 주인공은 큰애였다.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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