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육아일기
하루하루의 생활이 너무 단조로워서일까?
아이들이 쑥 자라면 한가해지는 시간을 여한이 없이 사용해 볼 것이라는 다짐과 각오는 나만의 착각이었던것인지.
가을 따뜻한 햇살아래 아파트 내 나무 그늘 벤치에는 책 한 권을 펴드신 어르신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젊을 때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한여름에서 지금까지 늘 그 모습이었다.
늘 같은 책 같은 페이지를 펴놓고 쉽게 책에 몰입하시지 못하고 조금 읽다가 두리번거리고 또 읽다가 졸기도 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 어떤 추억을 데려와 지금을 향유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이런 생활을 너무도 그리워했던 젊은 시절을 반추하면서 하루의 시간을 무채칼로 얇은 쌈무 자르듯이 그날들을 잘라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절 그때는 현재의 내가 이런 생활을 하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 하지 못하는 것을 다 해보리라는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녀는 나름 지적인 여성이었을 것이며, 취미칸에는 늘 독서, 영화라고 적어냈을지도 모른다.
<고즈넉이 늘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그녀에 나를 물들이듯이 이입해본다.>
참 젊었을 때였지.
우리 가족의 모든 하루가 아이의 일상에 맞추어 시간표가 돌아가는 하루를 보내고 저녁나절 어느 날
갑자기 너무 지루하며, 허탈한 감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이럴 땐 TV를 보지 않는 나로서는 복잡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긴 장편소설을 읽는 게 오랜 취미활동이었다. 컴퓨터도 직장에서 늘 두드리다 보니 집에 오면 열기도 싫어진다.
자꾸 스마트 폰에 길들여져 무의미한 손가락만 움직이는 나 자신이 오늘은 더 싫다.
하릴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같이 미치도록 흥미롭고 긴 소설은 없을까?
책장을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그나마 1, 2권으로 나누어진 "화두"를 뽑았다.
아주 젊은 시절 아마 30년 되었을 것이다.
분명 읽었으나 그 지은이가 "최인훈"이란 것 외에는 아무 배경지식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심코 자리를 잡고 의자를 갖다 받쳐서 다리를 쭉 뻗고 자세를 잡았다.
이럴 때는 진한 커피가 제격인데......
커피조차도 잠 안 오는 두려움에 추억의 저장고에 꽁꽁 가두어두어야 한다.
요즘 커피와 술, 초콜릿을 줄이려는 특별한 노력 중이라 이제 커피는 그만 따뜻한 물 한잔이면 충분히 족하다.
아무 생각 없이 첫 장을 넘겼다.
지지리도 악필로 갈겨쓴 책 서문 낙서가 나온다.
아~ 그땐 그랬었지......
새 책을 산 날은 조심스레 첫 장을 넘기고서 그날 나의 감정이나 인사말 짧은 이야기를 적었었지.
지금은 도서관에서 빌려오니 낙서는 생각도 못하지만 그땐 그랬었지.
갑자기 감정이 돋는다.
내가 쓴 갈겨쓴 그 글.....
"끝도 없는 지적인 공허.... 한 권의 책으로라도 대충 눈가림하려는 그 마음이 애달프다"
94. 7.27 세라와 저녁에
그때 그녀인 나는 무엇을 하다가 이 글을 썼을까?
94년 인 것으로 보아 아마 큰 아이는 겨우 3~4살.
그녀는 일 때문에 바쁜 그이 때문에 하루 종일 육아에 지쳐 힘들었을것이다.
아이는 씻기고 재우고 곯아떨어진 아이 곁에 누워서 갑자기 하루가 허무해서 책을 뽑아 읽다가 감정을 휘갈겼을지도 모를 일.
그 시절 그이들은 왜 그리 바빴을까?
30년 전 그 시절 그녀는 잠시 바쁜 사이에 책이라도 읽어서 점점 육아와 직장에 지쳐가고 있는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억이 없다......
그땐 먼 훗날 지금의 나와 같이 많은 자유와 여유를 누릴 것이라고 아마 굳게 믿으면서 저렇게 날려썼을 것이다. 이제 그때 내 곁에 누워있던 잠들었던 어린아이와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남남이 되었다.
자신의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가버린 것이다.
아~ 그때 그토록 그리워했던 자유와 지식의 향유시간이 지금의 이런 이별을 바탕으로 해야 얻어지는 것이었구나.
어느새 엄마를 훌쩍 뛰어넘는 키와 심리적 성숙으로 어른이 된 아이와 다시 저런 시간을 가질 수 없겠지.
조런 조런 수다도 떨면서 이야기도 나누며 둘레길을 걸어보기도 힘들겠지.
코 끝에 땀이 조롱조롱 맺혔고 엄마를 위해 힘들어도 기꺼이 같이 걷고 하기에는 여건이 어렵겠지.
이미 딸도 또 다른 그녀가 되었을 테니까.
잠시 책을 핑계 삼아 떠났던 그날의 추억은 다시 나를 제정신으로 되돌려주었다.
정신줄을 잡고 다시 내가 썼던 책 페이지 서문을 넘겨보았다.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제 곧 또 곁을 떠날 둘째 아이에 관한 일들을 점검해 본다.
작은 아이가 떠나고 나면 나도 아파트 벤치의 어르신처럼 똑같은 책을 몇 날 며칠째 들고 집중하지 못하고
한때 책 읽을 시간이 그토록 아쉬웠던 그 시절 추억놀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아이가 잠든 틈새를 비워 책을 읽어서 나의 지적 공허를 채우기에는 바빴던 나는 더 이상 없다.
시간은 많아졌으나 나이가 들어졌다.
책 한 챕터를 읽으면 벌써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온갖 해작질을 해댄다.
그리고 멀리서 잠이 꾸벅꾸벅 찾아온다.
이제 나는 지적공허를 메우려고 몸부림 칠 것이 아니라 갇힌 육신을 최대한 풀어서 자연 속에 던져두어야 한다고 자꾸 다짐한다.
그러나 아쉽다.
자연 속에 던져야 하는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인 줄 알았는데 먼 훗날 자식에게 짐이 안되려면이란
각오가 깔려 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돋는 소름을 느낀다.
오늘 다시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쩜 이 육아일기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나에게서 육아가 끝나지 않았음을' 느낀다.
p.s 결혼 35주년 기념을 스스로 기념하며 나에게 쓴 글입니다.
이미지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