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이었다.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하던 일에 대해 회의감이 생겨 고민 끝에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새롭게 구한 회사도 마침 주 5일 재택근무라 다행히 아이들 케어하는데 많은 지장이 없겠다 싶었다. 다니던 회사에 퇴사통보를 했는데 지금은 코로나 직후라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면서 주말직으로 몇 개월만 조금만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렇게 주 7일 재택근무가 시작됐다. 새 직장에 적응하랴, 주말근무하랴 바쁘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도 모르는 엔돌핀이 돌고 신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일에 욕심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그동안 회사생활하면서 스스로 자원해서 종종 추가업무를 받기도 했다. 한 번쯤 투잡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주말까지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넘처나는 일들로 으쌰으쌰 신이 나고, 투잡으로 매달 불어나는 통장잔고에 뿌듯해져 갔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케어하고, 아이들이 자고 난 다음에 집안일을 했다. 주로 주말에 모아서 하던 집안일들이 이제는 주말직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져서 하나 둘 쌓여가고 결국은 다음날로 미뤄지게 되었다. 네가족. 그리고 반려견과 반려묘가 사는 집에는 정말 쉴 새 없이 먼지가 생기고, 빨랫감과 설거지가 늘어갔다. 남편이 많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남편도 주 5일 회사출근에 주말에 하루 알바를 하고 있던 상황이라 둘 다 녹초로 쓰러져 잠드는 날이 많았고, 집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완벽주의. ISTJ인 나는, 매일 하지 못하고 놓치는 일에 대해서 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렇게 해도 놓치는 집안일이 생기면 그다음 날 꼭 해야 했고, 미루어진 일을 하다 보면 그날 해야 할 일을 미뤄야 하는 일들이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그 쯤 회사에서 하는 설문조사 중 "초능력이 갖고 싶다면 어떤 초능력을 갖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나는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48시간으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싶어요. 하루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다 못할 만큼 24시간이 너무 짧아서요'라고 적었는데, 그때 다른 직원들이 그걸 보고 의아해했었다. 그게 왜 주목받을만한 답인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답을 보니 모두 재밌거나 특별한 일을 위해 순간이동이나 하늘을 나르는 능력, 공간이동능력 또는 투시력등을 갖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저 하루에 일과를 소화하기 위해 하루시간을 늘리고 싶어 한 거였다.
아침에 눈뜨면 내가 어제 하지 못하고 지나간 일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나를 자책하고, 밤에 눈을 감을 때는 내일 해야 할 일들에 불안감으로 잠이 들었다. 아이들 학교 준비물을 놓치는 날이 생기면 내가 너무 부족한 엄마가 된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완벽하지 못한 나 자신이 스스로 효능감이 없다고 느껴졌다. 점점 스스로 내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꺼려졌고, 시간이 쫓기다 보니 밖에 나가 사람을 마주칠 일도 없어졌다. 결국 눈에 보이는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카페인을 찾고, 소화가 안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무기력해져 갔다. 세상에 아무것도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높고 푸르고 맑은 호주의 하늘을 보고도 매일 똑같이 보는 하늘이 그저 벽지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레아네 놀러 갔던 큰 딸을 픽업 갔다가 커피 한잔 하면서 레아엄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Maternity mental (산부인과 멘털케어) 쪽 간호사로 오래 일한 레아엄마는 사람들의 마음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아주 탁월한 재능이 있다. 레아엄마랑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어릴 적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날도 요즘 내 상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나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아 엄마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이 하루동안 해야 할 일들을 한번 적어본 적이 있나요?
그것들이 정말 하루동안 소화할 수 있는 양의 일이었나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그 일의 양을 재보려 하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로 모두 머릿속 to do list에 쑤셔 넣어놓고 스스로에게 다 해내야 한다고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 하루동안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아닌데도 그 모든 것을 해내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고 채찍질했었다. 갑자기 나는 나에게 미안해졌다. 생각한 일들을 모두 다 할 수 있다고 자만하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날 레아엄마는 나에게 딱 하나의 처방을 내려줬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 번씩 꼭 혼자만의 외출을 하세요.
장보기나 아이들을 스쿨 픽업을 하기 위한 외출 말고 당신만을 위한 외출을요"
생각해 보니 아무 이유 없이 나 혼자 외출을 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주말에 한 번씩 산책을 나섰다. 가족들이 주말에 늦잠을 자는 동안 30분에서 4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혼자 산책하고 멍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제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겨울이 와 있었다는 걸 알게 됐고. 앙상한 나무들이 보였고. 겨울아침의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동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바빠서 행복하고. 나를 찾는 곳이 많은 나는 유용한 사람이라고 기뻐하고, 돈을 잘 버는 내가 인정받는다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가짜 즐거움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애초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 거였다. 채워지지 않는 구멍 뚫린 항아이리에 나는 내 인생전부를 갈아 넣고 있었다. 결국 내가 왜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고, 결국 나는 인정받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고 사랑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난 어린아이 같은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짜즐거움 말고 진짜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많다는 것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맑은 공기. 기분 좋게 해주는 노래들. 재밌는 책 읽기. 우리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결국 일을 하나로 줄이기로 결심했다.
한 곳에 퇴사를 신청하고, 다른 곳 회사에는 일주일 휴가를 냈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여행을 했다. 3년 만이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신나게 놀고 행복해하는 걸 보니 새삼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인데. 뭘 보고 그렇게 달렸나 후회가 밀려왔다. 일을 하나로 줄이고, 나 스스로에게 주던 무리한 요구의 무게를 줄이기 시작했다. 하루에 할 수 있는 정도의 일만 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가자 정말 기분이 달라졌다. 생활이 즐거워지고, 작은 것 하나하나에 감사한마음이 들었다. 소화도 잘되고 몸도 가벼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뒤, 간호사로 일하는 한국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나에게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했지. 그러자 그 친구가 놀라면서 말했다. "그거. 우울증이야. 아주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이야. 나아지고 있다니 너무 다행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우울증을 겪었다는 걸 알게 됐다. 참 어리석었다. 내가 나를 이렇게나 모르고 살았다니..
어리석은 나를 꾸짖는 대신, 지금이라도 깨닫게 된 걸 감사하고 나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기로 결심했다.
오늘도 나를 돌보며 #slowliv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