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not your job
너의 일이 아니야
호주의 학교는 부모들이 학교 안 까지 들어와 교실 앞에서 아이를 픽업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어린 동생들은 언니, 오빠 픽업 전 학교 놀이터에서 재밌게 놀고 친구도 만든다. 아이 픽업 겸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산책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그렇게 아이 픽업을 다니다 놀이터에 같이 놀던 또래 남자아이 엄마랑 친해졌는데 마침 우리 큰아이와 같은 반인 레아의 엄마였다. 이게 인연이 되어 지금은 가족들끼리도 서로 잘 알고 고민도 나누는 내 친구가 되었다.
레아는 동생이 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우리 둘째와 또래인 조슈아. 돌도 안된 막내 애쉬다. 레아엄마는 우리가 알게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쯤, 조슈아가 ADHD판정을 받았으며,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다고 했다. 호주 엄마들은 대부분 자신의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에 대해 아주 쉽게 오픈하는 편이다. 잘은 모르지만 죠슈아는 내가 알고 있는 상식 그대로의 ADHD모습이었다. 아주 충동적이었고, 정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예고치 않고 하는 행동에 다른 아이들 혹은 어른들이 깜짝 놀라거나 불쾌해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다 같이 학교 놀이터에서 좀 놀다 오곤 했다. 그날도 놀아터에서 놀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어서 신나게 놀고 있던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겨우 집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슈아가 학교 울타리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달리고 달려 나중에는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할 때쯤 레아가 죠슈아에게 멈추라고 소리쳤다. 조슈아는 멈추고 뒤를 돌아 우릴 보고 조롱하듯이 손을 흔들더니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끌면서 쫓아가야 했던 레아엄마가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는 걸 알았던 레아가 엄마를 힐끗 보더니 전속력으로 달려 조슈아를 쫓아갔다. 나도 우리 아이들 손을 잡고 나도 빠른 걸음으로 레아와 조슈아를 뒤를 쫓았다. 최소한 나 라도 아이들이 보이는 곳에 있어야 맘이 편할 것 같았다. 나와 우리 아이들이 죠슈아가 근처에 갔을 때 레아는 찻길로 달려들려는 조슈아를 붙잡고 있었다. 레아는 화가 단단히 나서 아주 단호하게 죠슈아를 혼내고 있었다. 고작 5살밖에 안 된 아이가 2살짜리 아이를 혼내면서 가르치는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 귀엽고 기특했다. 어른스러운 큰 딸노릇을 톡톡히 하는 레아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조금 기다리자 레아엄마가 도착했고, 레아엄마는 조슈아를 데리고 구석으로 가 훈육하고 주의를 줬다. 그리고 레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Thank you so much for keeping Joshua safe. But this is NOT your job. That's my job"
조슈아를 위험에 빠지지 않게 도와준 건 고마워. 하지만 레아야 이건 네 일이 아니야. 엄마의 일이지
레아 엄마는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듯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조슈아가 이렇게 충동적으로 도망가는 일이 자주 있다고. 그럴 때마다 레아가 잡으러 뛰어다니고 조슈아를 엄마처럼 훈육하려 한다고. 이제는 애쉬도 레아가 계속 보살피려 한다고 했다. 레아엄마는 레아가 동생들을 자기가 다 챙겨야 한다는 마음을 덜어 버렸으면 한다고 했다. 그건 아이의 몫이 아니라고.
"It's not your job. That's my job"
그 말이 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계속 때렸다.
아. 엄마의 일과 맏딸의 일은 다른 거구나.
나는 맏딸로 태어나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8살 때부터 하루종일 집을 지키고, 동생 돌보고, 밥을 챙겨주고, 엄마아빠가 오실 시간에 맞춰 청소를 해두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내가 엄마의 일을 해야 엄마가 편해지고 그래야 내가 예쁨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항상 돌아오는 말은 "첫째니까. 네가 맏이니까. 동생을 돌보고 양보하고 살림 도우는 건 첫딸로서 당연히 해야지"라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의 일을 해야 하는 당연한 아이였다.
첫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어른들의 책임을 지고 살았던 나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첫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식을 양육하는 건 부모의 일이다.
우리는 그저 첫 번째로 태어나게 되었을 뿐,
첫째든 둘째든 순서에 상관없이
아이는 존재만으로 귀하고 사랑받아야 한다.
당연히 어른들의 일을 해야 하는 아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