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린 Aug 17. 2024

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아이와 살기로 결심한 이유

출산 & 육아 in 호주 그리고 호주의 교육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만 18살. 캐리어하나 끌고 혼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거대한 섬. 호주에 왔다. 평생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고 영어학원 한번 다녀본 적 없이. 공항에서 손 흔들어주던 엉 마아빠를 보면서 용감 무식하게 빠빠이 인사 하고 비행기를 탔다. 젊어서 그런지 정말 겁이 없었다.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에 신이 나기만 했다. 

하지만 그 겁 없고 신나는 유학길이 그렇게 길고 지독한 향수병에 빠지게 할 줄 몰랐다. 지금처럼 카카오톡이 있어 가족과 친구랑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국제우편을 사서 편지를 보내고 국제전화카드를 사서 공중전화를 걸어야 가족들이랑 전화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여차저차 길고 긴 5년의 어학연수 + 대학교 유학길의 막바지가 왔다. 졸업을 앞두고 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한국에서 쓰게 될지 몰라 대학을 다니며 틈틈이 공부해 테솔 (영어 강사 자격증)도 땄고, 미국으로 인턴쉽을 가보고 싶어 에이전시 이곳저곳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내 남편이 된 남자친구랑 교제를 하게 되었다. 첫 데이트부터 우린 생각이 너무 잘 맞고 이야길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생활 패턴부터 인생의 가치관. 육아교육관까지. 모두 잘 맞았다. 우린 연애 초기부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 사람과의 미래가 그림으로 그려졌다. 내가 바라던 꿈같은 가족의 모습.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한국을 가면 롱디커플이 되어야 하는 건 정해진 미래였다.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프러포즈를 받았고.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됐고 호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만 23살이었다. 

둘 다 자취생활이 길었고, 아이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가 찾아오길 기대했다. 젊다고 자신했지만 3번의 유산을 겪었고. 포기해도 된다고 맘을 편히 가진 후 감사하게도 네 번째 임신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임신의 기쁨도 잠시 임신기간 동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높은 다운증후군 가능성, 갑상선 호르몬 저하, 심한 비타민 D 결핍, 임신성 당뇨위험으로 피검사 8번. 다운증후군 관련 특별상담 및 양수검사를 권유받았다. 이미 유산을 세 번이나 했는데 양수검사를 하면서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유산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던 우리는 어떤 모습의 아이이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우리 둘이서만 견뎌내는 것이 정말 외롭고 힘들었다. 


출산 날이 다가왔다. 예정일보다 3 주일 찍 양수가 먼저 터져서 병원에 달려왔다. 첫아이임에도 출산 진행속도가 빨랐고 아이가 탯줄을 목에 감고 있어서 의사들도 아이 맥박이 늦어지기 전에 빨리 아이가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무통주사를 원했지만 이미 자궁이 거의 다 열려서 무통주사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대신 laughing gas라는 가스를 마시게 해 줬는데. 정신이 몽롱해지고 하늘이 노래졌다. 의료진의 목소리가 저 멀리 서 들이는 듯했다. 그때 "MUMMY! MUMMY!" 의료진들이 정신이 혼미해지는 나를 붙잡고 엄. 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머릿 끝에서 발끝까지 찌릿하고 전율이 왔다. 그때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걸 느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엄마다. 우리 아이가 무사히 나올 때까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분만실에 들어간 지 46분 만에 아이는 건강히 세상에 나왔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 것은 너무 감사했지만,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고, 내 모든 뼈 마디마디가 으스러진 것 같았다. 그런 내 몸 위에 핏덩이 아이를 올려두고 의료진들은 나갔다. 정말 아이와 같이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주에서는 아이가 출산 직후부터 바로 엄마와 붙어있어야 아이가 엄마랑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호주에는 신생아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철저히 아이를 위한 시스템이다. 


그렇게 누워있던 나에게 의료진이 들어와서 이제 일어나서 샤워를 할 시간이라고 했다. 그 몸으로 일어나서 샤워를 하라는 게 가능한 건가. 정말 산모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쓰러지는 몸을 여러 번 붙잡고 졸도 일부 직전의 상태로 겨우 씻고 추워서 벌벌 떨며 침대에 누워있는데 의료진은 다정한 얼굴로 차가운 샌드위치와 주스를 갖다 줬다. 그분들의 다정함이 무색하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 했다. 남편에게 핫초코를 부탁해 분만실에서 내보내고,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휠체어를 타고 입원실로 옮겨졌다. 다른 산모 한분과 같이 쓰는 병실이었다. 그나마 아기아빠에게 아기를 맡기고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났는데, 병원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보호자는 저녁 8시 이후로 있을 수 없다는 방송이었다. 아이아빠는 아이와 나를 덜렁 두고 병원에서 나가야 했고, 나는 밤새 우는 아이를 두고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눈물만 흘렀다. 그나마 옆에 방을 같이 쓰시던 산모분이 네 번째 출산인 프로 엄마이셨다. 그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 눈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거리던 내가 얼마나 불쌍했으면 본인도 쉬셔야 하는데 나를 그렇게 도와주셨을까. 감사한 은인이다. 다음날 기다리던 아침이 왔고, 방문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아이아빠가 왔다. 아이아빠랑 하룻밤만에 상봉하는데도 얼마나 반갑던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상봉의 기쁨도 잠시, 병원에서는 퇴원 준비를 하라고 했다. 호주에서는 국립병원에서 출산을 하면 하룻밤 입원을 하고 바로 퇴원이다. 그렇게 아이를 낳은 지 24시간 만에 집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친정엄마가 도와주러 오셨지만 2주만 있다 가셔야 했다. 제대로 몸이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리 부부는 고군분투를 시작했다. 등에 센서가 달린 아이는 눕힐 때마다 울었다. 밥 먹고, 자고, 집안일을 할 때에도 아이를 계속 안고 있었다. 그야말로 24시간 교대로 아이는 엄마 품과 아빠 품에서만 살았다. 우리의 밤이 낮이 되고 피곤함이 하루하루 쌓여가는 동안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이제는 제법 혼자 앉아 있기도 하고 걷기도 할 무렵, 아이와 집에서만 있는 게 답답해졌다. 만 25살에 에너지 넘치는 나이. 친구들이랑 만나서 수다도 떨고 싶고, 맛있는 한국음식도 먹고 싶었다. 한국이라면 문화센터 다니면서 다른 아기엄마도 만나볼 수 있고 아이도 재밌는 문화생활을 해볼 텐데... 슬슬 다시 내 향수병이 돋고 있었다. 산후우울증과 향수병의 콜라보는 내 우울감의 최고도를 달리게 했다. 결국, 남편에게 한국에서 몇 년만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아직 우리는 20대 중반이고, 대졸에 영어를 능통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 일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랑은 단칼에 거절했다. 어릴 적부터 해외에서 살아온 신랑은 다시 한국에 가서 살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틈만 나면 신랑에게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그때마다 신랑은 거절했다. 어느 정도는 결혼하면서부터 내가 호주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긴 했지만 신랑하나만 보고 이곳에 있는 나로서는 서운함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남편이 이 부분에 대해 많이 미안해하고 있다)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임신과 출산을 하고도, 심한 향수병에 괴로워도, 그렇게도 한국에 가고 싶다는 내 마음을 접게 해 준 하나는 바로. 



호주의 교육




내 마음을 사로잡은 찐 호주의 교육은 내가 아이로 한국에서 살아온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며 좋은 교육 그리고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배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호주 원어민 엄마들과 육아하며 나눈  소소한 육아 에피소드들과 호주에서 직접 어린이집, 학교에 아이를 보내며 겪은 일들을 글로 담아보려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