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이앞에서 감정 표현을 하나요
우리 큰아이는 어릴 적 유치원에 다녀오면 재잘재잘 하루에 있었던 일을 잘 이야기해 주곤 했다. 유치원 교실의 출석현황부터 누가 무엇을 먹었고, 얼마나 남기고, 미끄럼틀은 누가 젤 많이 타고 놀았는지.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오늘 하루종일 회사에 있었는지 유치원에 있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학교를 입학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곧 졸업을 앞둔 아이는 아직도 학교를 다녀오면 반의 정원 수가 몇 명이었는지 누가 병가를 내고 결석했는지 두루두루 TMI가 가득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아이들의 에너지가 잠시 식어가는 밤이 되면 늘 엄마들의 채팅창이 뜨거워진다.
이 집 저 집에서 엄마들의 푸념타령이 흘러나왔다.
학교가 끝나고 씩씩거리면서 집에 오는 내내 우는 아이 달래느라 힘들었다는.
평소와 같은 잔소리였는데 아이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놀랬다는 엄마.
오늘 아이한테 욕을 들어 황당했다는 엄마.
평소에도 있는 푸념 줄거리였지만 아이들이 4학년이 되면서 더 심해진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 다른 엄마들도 직장상사보다 무섭다는 여자아이의 사춘기가 슬슬 오는 것 같다며 두려워했다. 사실 나는 다른 엄마들이 푸념타령을 할 때마다 내놓을 이야기를 찾지 못하고 반응만 해주곤 했다. 우리 아이는 감정이 널뛴다거나 드라마틱한 행동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말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른 엄마들은 항상 어쩜 그렇게 순한 아이를 뒀냐고 럭키라고 했다. 나도 그 부분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어느 날, 같은 반이었던 레아 엄마한테 문자가 왔다. 레아가 학교 끝나자마자 울며불며 엄마한테 달려와 말하길, 여자아이들이 단체로 서로 학교에서 말싸움이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아이들 하나씩 불러 면담을 했으며. 우리 아이들이 이 사건에 포함되어있다고 했다. 레아는 이 일로 큰 울음을 쏟으며 학교를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중이라고도 했다. 꼭 양쪽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 법. 방과 후 프로그램이 끝나고 집에 온 우리 아이에게 이 일에 대해 물었고, 아이는 그 일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결과 등 관련 인물들의 대화내용까지 경찰청 브리핑보다도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아이들이 잠든 밤, 전체적인 내용을 몰라 어리둥절한 레아엄마에게 연락해 내가 아이에게 전해 들은 자세한 자조치종을 설명해 주며, 레아마음이 잘 달래지기를 바랐다. 고맙다고 하며 레아엄마는 우리 아이가 괜찮은지 물었다. 머.. 괜찮은 것 같다고 얼버무리며 대답해 버렸다. 사실 우리 아이가 괜찮은지 아닌지, 나는 몰랐다. 아이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아이의 표정이나 말에서 슬픔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다고 내가 판단했을 뿐이다. 레아와 우리 아이 모두 똑같이 겪은 상황인데 레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끼고 왜 우리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진짜 우리 아이는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가 학교든 유치원이든 하나부터 열까지 하루 있었던 일을 자세히 나와 공유해 왔기 때문에 나는 우리 아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며 살았다. 그런데 레아엄마가 한 질문에 단단했던 내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의 일과를 다 알고 있다고 해서, 과연 내가 아이에 대해 진짜 다 아는 것일까.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매일 "Good 굿!"으로 대답해 주던 아이모습이 떠올랐다. 아이가 '굿' 이외에 다른 말로 대답해 준 적이 있었던가? 우리 아이의 'Good'은 정말 좋다는 뜻일까. 매일 하루하루가 좋을 수만은 없을 텐데. 왜 나는 좋다고만 하는 말을 그대고 믿고만 있었을까.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의문들 속에 잠겨 나는 잠 못 이루는 날들을 보냈다.
답을 찾으려면 나는 솔직해져야 했다.
레아엄마에게 아주 솔직하게 말을 했다. 내 아이가 괜찮은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
우리 아이는 있었던 일들을 모두 나와 공유하지만 나는 아이의 진짜 마음을 모른다고.
울고 화내고 짜증 내지 않고 늘 웃는 얼굴로 굿!이라고 하는 순하고 편한 아이 인 줄만 알고, 진짜 우리 아이에 대해 잘 모르는 부족한 엄마라고. 내 아이에 대해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 엄마라니 나는 자격부족이라고.
레아엄마는 무너지는 나를 달래며 말했다.
또 레아엄마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이 앞에서 한 번도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절대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해피하고 씩씩하고 강한 엄마로 보이고 싶어서. 힘들고 슬픈건 아이앞에서 숨기려 노력했다. 내가 표현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레아엄마가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감정 표현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아이도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로린씨 먼저 시작해 보세요. 아이는 금방 배울 거예요"
아이에게 괜찮다고, Good이라고만 하는 엄마 앞에서 아이는 괜찮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겠구나. 마음이 아팠다. 그래. 역시 금쪽이는 부모야. 내가 달라지면 우리 아이도 나처럼 강한 모습 보이려 힘든고 슬픈 모습 숨기면서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하니 내 의지가 불끈 솟아올랐다.
수십 년 감정을 감추고 누르기만 하며 살아온 내가 하루아침에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뒤로 열심히 노력했고. 진짜 레아엄마 말대로 아이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내 앞에서 울기도 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얼굴이 붉어지도록 나에게 이르기도 한다. 집에서 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아이의 감정표현이 늘었다. 화가나면 친구에게 화가 났다, 혼자 있고싶다고도 하고 슬프면 울기도 한다.
이제는 아이의 하루가 Not Good인것이 기쁘고, 그렇게 말해주는 아이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