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늪에선 목이 긴 장화를 챙겨요

좀 거닐다가 보송보송한 발로 나와야 하니까

by 로렌스


잘 챙겨 먹다가 한 이틀쯤 약을 또 잊었다. 서둘러 이럴 때 찾았던 방법을 공유해야겠다.

긴 기간 동안이 아니어도 함부로 단약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데, 하루 이틀 삼일을 쭉 잊거나 안 먹거나 의도하며 건너뛰거나

여하튼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는 게 참 힘들다. 결과를 알면서도, 나도 모르는 새 이렇게 되어버리니 말이야.



그래도,

발 빼려면 푹 빠지고 다시 끈적끈적한 뻘에 허벅지까지 주욱 빠지는 절망이 와도

좋아하는 색과 모양을 한 목 긴 장화를 준비하며 ‘그래 별 수 없을 때는’ 하고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꼭 읽지는 않아도 되고

1. 책 고르기

한 권의 두께도 어깨를 누르는 때. 읽겠다는 다짐을 잠시 잊고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만 맞춰

제목들의 향연에 빠져본다. 분명 꼭 메모해야 할 만큼 몇 권 씩 맘에 남는다. 읽으면 더 좋고.


밥 짓기 보다는

2. 누룽지 만들기

어제 문득 생각난 조용한 저녁 덕에 건져진 방법.불이 있는듯 없게 조절하고 두꺼운 냄비랑 마주하기다.

생각보다 냄비밥은 빨리 완성되니까 따뜻하게 지어진 밥은 위아래 열이 골고루 한 번 더 돌도록 섞어주고 다시 곱게 뚜껑을 덮어 준다.

잘 익은 밥을 싹 긁어내 따로 담고 나서 토독토독 부서지는 잘 눌러진 누룽지를 주걱으로 힘 줘 가며 떼어 본다. 아, 오래 기다린 고소함.


나가서 좀 걷는게 아니야

3. 아주 짧은 지도를 따라 가기

생각해 보면 루틴이라곤 없는 흐린 하루들이라 생각했지만 내게 또렷하게 그려지는 일과가 있었다. 사과를 잘게 잘라 한 알 다 먹고 간단히 커피를 만들고 나면

대충 옷을 껴입고 태블릿과 책 한 권을 들고 미미한 기대와 함께 자주 가는 카페로 간다. 그냥 앉아서 쇼핑하거나 웅크리고 있다 보면 제대로 준비해서 나가야 할 시간.

그럼 마음이 급해져 다시 우다다다 집으로 돌아온다. 그럼 짧은 산책 끝처럼 살짝 상쾌함이 얼굴 근처를 휘~하고 돌아 나가기 직전보다 훨씬 나은 상태가 된다.

햇빛 맞을 겸 좀 걸으면 많이 나아진다는 권유가 아주 부담스러울 때 있다. 어제 왔다갔다 움직인 기록이 있다면 그것이 내 짧은 지도. 무념무상으로 반복해볼 것.


향기

4. 귤껍질 꽃모양으로 까기

그래서 모은다. 차곡차곡 올리다 보면 달큰하고 상큼한 향이 가볍게 퍼지기 시작. 지금은 귤의 시간들이니까 많이 먹어도 좋잖아.

모은 껍질은 투명하고 낮은 그릇에 물을 약간 담아 넣어 둔다. 잘 들어보면 다라라랑 껍질과 과육이 분리되는 소리가 난다. 손끝 노래지며 좀 나아진다, 무엇이든.

+새로 산 핸드크림의 유자향이 정말 좋다. 향기는 자꾸 조금조금씩, 킁킁 ‘아하~좋다 향기‘하고 말을 남기게 한다.


무겁게 고백하는 대신

5. 누군가가 만든 짧은 문장 깨끗한 종이에 쓰기

‘지금의 상태를 한 번 기록해보세요’ 같은 제안도 두렵고 부담스럽다.

터져나오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 역시 지금 상태에서 참 중요한 과업이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맞을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잠시잠깐이라도 펜이나 연필을 들고 글자를 새겨보는 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환기’의 방법 같다.

요즘 나는 브런치북에 아이패드 필사 중이다. 정말 짧은 문장을 쓰기 때문에 정말 말 그대로 짧은 시간이다. 가라앉는 맘을 문장으로 승화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 아닌데

세상에 너무 많은 숭고한 문장들과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은 말들이 이렇게 많이 같은 자리에 있어주었다니! 벅찬 시간이기도 하다. ‘필사의 힘’



다섯 중 하나 정도는 누군가를 조금 움직였기를.

저는 귤을 주문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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