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권태기를 지나며

2017년 생존기

by 유녕

2017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작년이나 올해나 아팠다. 아프면서도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필자가 각 해에 가장 좋아했던 스릴러 한드들에 비유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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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가장 열광하며 보았던 드라마는 SBS의 <원티드>였다. 스릴러물 마니아로서 한드에 짬뽕(?) 스릴러물은 많을지 몰라도 괜찮은 정통 스릴러물을 찾기가 참 힘든데, <원티드>는 필자가 봤던 한드 스릴러물 탑 3 안에는 들어간다. 딱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말 한드스럽지 않은 한드다. <히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등장하는 여주 원톱 스릴러 한드이며,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드라마. 한드스럽지 않은 특유의 어두움과 우울함, 그러면서도 한 가닥 희망은 버리지 않는 이 드라마 특유의 염세주의가 너무 좋다. 정혜인을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도 한드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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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두말할 것 없이 TVN <비밀의 숲>이다. <원티드>만큼은 아니어도 이수연 작가의 드라마들은 계속 주시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취향에 100% 부합하는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깊이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다른 건 몰라도 최종화만큼은… 정말 최고였다.



<원티드>와 <비밀의 숲>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작가들의 첫 데뷔작이었으며, 사회 고발 스릴러물이다. 정혜인, 한여진과 같이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고 하나의 거대한 배후를 필두로 여러 사건 엮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두 드라마의 차이점을 묘사하라면 딱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원티드>가 뜨겁고 크게 타오르되 메마른 불이라면,

<비밀의 숲>은 겉은 살얼음이 끼되 속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호수와 같다.


필자의 작년과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년은 많이 괴로워했다.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와 보니 다시 재적응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여름에 풀리지 않는 게 너무 많았다. 아끼는 사람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었고, 인연이 마음대로 되질 않아서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불이 타올랐다. 천성이 워커홀릭인지라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더 힘들어서 스케줄을 많이 잡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새로운 인연들이 생겼고, 그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작은 동굴이 생긴 느낌이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터 놓을 수 있고 숨을 수 있는 작은 동굴.


올해는… 참 설명하기 어렵다. 어느 방면으로는 많이 무뎌졌는데, 다른 방면으로는 많이 날카로워졌다. 아끼는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에는 익숙해졌는데, 스스로가 변해가는 모습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가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 확고하다고 믿던 어떤 선이 무너지는 느낌. 달리지 말아야 하는데 달리고 있는 느낌. 스스로 그어둔 선을 너무 늦게 풀어놨다. 그래 봤자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데, 혼란만 가중될 뿐인데.




일명 ‘노잼 시기’라고들 하지. 삶의 권태기를 지나고 있다. 사실 살면서 권태를 느끼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권태를 버틸 수 있는 목적은 두고 있었다. 작게는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다방면의 분야들일 것이고, 크게는 스스로가 확실하다고 믿던 길이다. 큰길은 무너졌고, 작은 것들로 버티는 중이다. 지독히도 애증하는 힙합과 여전한 스토리 중독증과 춤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들 비슷하다.


희대의 명드 <연애시대>에 유명한 명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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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슬픔 없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연애시대> 9회 中


<연애시대>에서 어른들을 버티게 하는 것은 연애라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취미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더 사랑하는 무언가겠지. 현재의 필자에게는 그 무언가가 확실하게 없는 느낌이다. 그 무언가가 없는데 달리고 있으니 지칠 수밖에.




며칠 전에 회를 잘못 먹고 체했다. 가끔 일 년에 한두 번씩 이렇게 체하고 아플 때가 있다. 진짜 원인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지인 중에서는 “너가 그렇게 바쁘니까 몸이 반란 일으킨 거야.”라잔소리하기도 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할 것 같다. 작년에는 크리스마스 다음날까지도 자기소개서를 쓰느라 바쁜 자소설 크리스마스였는데, 올해는 크리스마스 날까지 쭈-욱 아프다가 계절 학기를 듣고 있으니(그것도 1교시를). 친구는 잔소리 불러일으키는 기집애라고 또 잔소리를 한다. 또 다른 친구는 식중독은 그저 계기에 불과할 거라 한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그런 거야. 맘고생 좀 그만해 임마.


그러게, 난 도대체 언제 쉴까.


시험이 끝나고 크리스마스 연휴 4일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푹 잤다. 체했어도 이 정도로 오래 쉰 적은 오래간만이다. 속이 울렁거리거나 배가 아픈 건 하루에 끝났다. 다만 오랫동안 입맛이 없던 것뿐. 한 끼에 반 공기도 못 먹는 채로 3-4일을 지냈으니 강제 다이어트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매일 같이 딸에게 살 빼라 말하는 엄마는 정작 이럴 때 못 먹어서 어쩌냐고 걱정한다. 물론 그보다도 철없는 아빠는 피부 좋아졌다고 웃고.


지구 반대편에서 자기도 대학교 4학년 때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며, 너무 걱정 말라며 강아지 한번 키워보는 거 어떻겠냐는 언니의 메세지에 도서관에서 찔끔 울고 말았다.


그래도 오히려 잘 되었다고 느낀다. 아프긴 하지만, 기왕 이리된 거 다 게워 내야지.

내 안에 쌓인 권태와 우울, 무기력함과 슬픔이 다 날아가버릴 수 있게.

내년은, 2018년은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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