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피터스 문>: 폭력을 압도하는 판타지와 연대
※ 하이라이트 측의 초대로 특별시사회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난민의 디스토피아로 돌아온 코르넬 문드럭초
초대 메일을 처음 받았을 때 흥미로웠다. 난민이 슈퍼히어로인 영화라니. 전작 <화이트 갓>도 인상 깊게 본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의 작품이었기에 기꺼이 신청했다. <화이트 갓>은 딱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유기견 입장에서의 미러링 영화’다. 믹스견에게 세금이 부과되어 버려진 유기견이 투견장에도 끌려가고 안락사당할 뻔했다가 결국 인간을 죽이고 자신과 같은 유기견 200마리를 이끌고 부다페스트 도심을 점령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인간들을 죽이는 스토리. 분노한 유기견들을 진정시키는 것은 총도 칼도 아닌, 자신의 강아지를 찾던 소녀의 트럼펫 소리였다. <화이트 갓>의 엔딩씬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는 직접 보아야 안다. 개, 그것도 유기견의 시선에서 영화를 만든 이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했다. 과연 난민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풀어냈을까.
<주피터스 문>은 <화이트 갓>과 전체적인 전제와 전개는 비슷하다. 다만 표현의 방식이 좀 다르다. <화이트 갓>이 직관적이고 강렬하다면, <주피터스 문>은 롱테이크와 CG가 많은 만큼 더 우아하고 은유가 많다. 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다면 <화이트 갓>을 더 추천한다. <화이트 갓>을 한번 보고 나서 <주피터스 문>을 본다면 영화의 구조가 훨씬 이해가 잘 될 것이다. 다들 좀 많이 봤으면 좋겠다. 예멘 난민 문제에 자기도 모르게 인종 차별하지 말고 제발.
난민, 천사가 되어 날아오르다
시리아에서 헝가리로 건너온 소년 ‘아리안’은, 강을 건너오던 도중에 아버지를 잃고 만다. 아버지가 뒤에서 따라올 것이라고 믿고 사람들과 함께 도망치던 아리안은 숲을 달리고, 이가 바로 영화의 첫 장면이다. 아리안이 숲 속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 롱테이크 장면이 이어지고, 아리안을 쫓던 난민 사냥꾼이 결국 그에게 총을 쏜다. 원래대로라면 아리안은 그 자리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아리안은 죽기는커녕,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에서 숲 속에서 도망치는 난민들을 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아리안은 하늘을 돌다 다시 숲으로 떨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난민 캠프에 들어온 아리안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본 스턴의 도움으로 난민 캠프에서 벗어난다. 스턴의 병원에 머무르던 아리안은 병원에 누워있던 할머니와 손자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거기서 스턴은 아이디어를 얻는다. 스턴은 아리안을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자신이 몰래 면대면 대담을 하던 환자들에게 아리안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갑부 할아버지는 아리안에게 돈을 던져주고, 아리안의 재주를 믿지 않는 깡패의 집은 360도 돌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소년은 천사가 된다.
물론 아리안은 여전히 힘이 없다. 헝가리어를 하지 못하고 영어도 간간히 하기 때문에 스턴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말한 지하철역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바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한다. 아리안은 스턴 덕분에 비싼 레스토랑에도 가지만, 아리안은 프렌치프라이만 찾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리안이 무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리안은 중환자를 앓는 환자의 눈을 보고는 기꺼이 자신의 능력으로 안락사를 시킨다. 스턴은 아리안에게 화를 내지만 아리안은 자신의 판단으로 그런 판단을 내렸다. 아리안은 점점 아버지를 찾아주겠다는 스턴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는 아리안이 야만적인 문명 속에서 살아남고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안티 히어로로 거듭난 기득권, 스턴
솔직히, 아리안보다는 스턴이 훨씬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아리안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한 난민 슈퍼히어로지만, 스턴은 한마디로 부패한 의사다. 난민 캠프에서 난민 브로커 일을 하고, 때문에 스턴의 애인이자 동료인 베라는 스턴을 도와주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스턴이 돈을 잘 버는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브로커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차차 등장한다. 그가 난민 중 한 명의 수술을 하다가 의료 사고가 났고, 그 환자는 난민이었지만 촉망받는 축구 선수였다. 곧 그의 유족들이 스턴에게 큰 액수의 청구 배상을 요구했다.
이런 배경의 스턴이 왜 아리안을 데리고 다녔을까. 물론 스턴은 큰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아리안을 이용한 점도 있다. 아리안과 잠시 해변가에 머무를 때 아리안이 “이러고 있으니 관광객 같네요”라 말하니 “난민과 관광객은 차이가 크지”라 대답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안과 스턴이 맺는 관계는 묘하다. 아리안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숨기지만, 의료사고로 죽은 난민에 대한 죄책감도 아리안에게 털어놓는다. 스턴은 아리안을 통해 변해간다. 영락할 것 없는 백인 중년 의사 남성이었던 그는, 점차 아리안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의료사고로 죽은 소년의 유족을 찾아가 직접 사과한다. 아리안이 사라졌을 때, 아리안의 아버지 시신을 직접 찾아 유물을 챙긴다. 그리고 아리안을 다시 만났을 때는 호텔 파티에서 아리안을 “귀한 왕자님이 왔는데!”라 뻐긴다. 이는 레스토랑에서 아리안의 초능력에 대해 떠들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레스토랑에서 스턴은 프렌치프라이 찾는 아리안을 우습게 여기지만, 호텔에서는 기꺼이 아리안에게 프렌치프라이를 찾아준다.
<주피터스 문>은 은유가 많고 우화적인 영화다. 그리고 아리안은 예수를 토대로 한 캐릭터다. 아리안이 예수라면, 스턴이 정확히 어떤 인물에 해당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수를 부정했다가 다시 만난 베드로인가, 아니면 예수를 배신하고 자살한 유다인가? 굳이 따진다면 베드로가 아닐까. 스턴은 <화이트 갓>의 다니엘과 역할이 비슷하다. <화이트 갓>에서 릴리의 친아버지 다니엘은 딸과 다르게 도축 전공이고, 고기를 구워 먹고 딸이 개를 아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릴리를 점차 이해하면서 유기견 센터에 같이 찾아가거나 개를 다시 입양해도 된다고 제안한다. 엔딩씬에서 트럼펫 소리를 듣고 여명 속에 잠든 개들과 함께, 릴리와 다니엘은 길거리에 몸을 눕는다. 감독 자신이 백인 중년 남성이라서 그런가, <화이트 갓>에서나 <주피터스 문>에서나 소수자 문제에 눈을 뜨고 변하는 기득권 백인 남성은 항상 중요한 포지션에 있었다. 끝에서 스턴은 아리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화이트 갓>보다 훨씬 처절한 각성이다.
추측이지만, 결국은 스턴이 아리안을 사랑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리안이 스턴의 삶으로 들어오면서 스턴은 애인 베라에게 소홀해졌고, 스턴이 그렇게 아리안에게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된 것은 사랑으로 밖에 잘 설명되지 않는다. 유사 부성애? 사랑?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르지만, 바텐더가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스턴에게 털어놓던 씬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스턴은 자신도 모르게 천사를 사랑했던 게 아닐까.
“꼭꼭 숨어라… 이제 찾는다!”
아리안의 친척들이 헝가리 지하철에서 테러를 하고, 그렇게 아리안도 덩달아 테러리스트로 수배된다. 아리안을 찾은 스턴은 함께 호텔로 숨지만, 아리안을 쫓던 난민 사냥꾼이 쳐들어온다. 총을 대신 맞은 스턴이 눈도 감지 못한 채, 아리안은 유리창을 깨고 야만적인 문명을 피해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아리안이 내려다보는 부다페스트는 아름답다. 아리안을 보고 온 도시가 멈춘다. 사람도 멈추고 차도 멈추고 헬기도 멈춘다. 그 정지된 순간 속에 움직이는 것은 날아오르는 아리안 뿐이다. 빛나는 태양과 구름과 아리안으로 꽉 찬 엔딩 씬은 아름답다. 그저 아름답다.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가 싫어질 정도로.
그 마지막에 움직이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가 숫자를 센다.
영어가 서툴러 숫자도 거꾸로 세던 아이, 난민 아이가 숫자를 다 세고 외친다.
“꼭꼭 숨어라…. 이제 찾는다!”
"신의 손길을 보고도 믿지 않으니,
왜 너만 땅의 주인으로 행세하려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