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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녕 Sep 12. 2018

서로의 질문과 대답이 되어

제 12회 여성인권영화제 프리뷰 나잇

※ 피움 프리뷰 나잇에 초대되어 쓴 글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될 거야



작년에 지인 덕에 여성인권영화제를 처음 갔다. 메가박스 신촌에서 열리는 큰 규모의 서울 국제 여성영화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공짜 표를 얻고 스페인 다큐멘터리 <라 차나(La Chana)>를 보았다. 집시 출신으로서 스페인 사회에서 차별받았지만 스페인의 그 누구보다도 전설적인 플라멩코 댄서인 라 차나. 80에 가까운 나이에 플라멩코를 열정적으로 추고 나서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던 라 차나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제 12회 여성인권영화제가 이번에 다시 개막한다. 처음으로 개최하는 프리뷰 나잇 행사에 참가할 수 있어서 기뻤고, 신촌의 한 카페에서 열린 프리뷰 나잇에서는 샌드위치(비건 옵션 有), 옥수수 차와 주스를 받을 수 있었다. 상영되었던 영화와 관련된 공짜 생리대도 받을 수 있었다. 


프리뷰 나잇답게 선 공개작은 총 네 개의 단편영화였다. 여성인권영화제와 같은 독립영화제의 묘미 중 하나가 단편영화 아니던가? 두 편 정도는 엄청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였고, 나머지 두 편은 진지한 시사 팩션 영화들이다. 그리고 보는 내내 여성인권영화제 운영진들의 안목에 감탄했다. 제 12회 여성인권영화제을 맛보기에는 충분했다. 


위장 기혼



인도 뭄바이에서 혼자 사는 여성 스미타의 일화를 보여주는 단편영화다. 배우자에 의한 폭행이 인정되지 않는 나라 인도에서, 스미타는 간신히 폭력적인 남편의 집에서 탈출한다. 그러나 남편에게서 벗어나도 사회는 스미타를 가만 두지 않는다. 어딜 가든 스미타의 남편을 찾는다. 혼자 사는 여자는 집을 구할 수 없고, 남자 부동산 중개자는 스미타에게 같잖은 수작을 건다. 지친 스미타가 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도, 어머니는 자신보다 남편과 아이들을 찾는다. 결국 스미타는 ‘위장 기혼’을 하고 집을 구한다. 겨우 구한 집은 아무것도 없고 평안하다. 폭력적인 남편도 없고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도 없고 오로지 자신뿐이다. 비록 위장 기혼이라도 스미타는 자유를 얻은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생리 무법자(Free Period)



발칙하다. 


영국의 한 고등학생 리사가 갑자기 학교에서 생리가 나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는 단편영화다. 리사는 당장 생리대가 없다. 화장실의 생리대/탐폰 자판대에 넣을 동전도 없고 가방에 생리 용품도 없다. 억지로 휴지를 속옷에 구겨 넣고 교실로 뛰어왔건만, 다리 사이로 피가 흐른다. 당황할 법도 하지만, 우리의 생리 무법자 리사는 당돌하게 나아간다.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 


“ (생리혈 묻은 휴지를 던지며) 내 치마 속이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봐, 이 소추 새끼야!!!!”


좋은 부모 대소동(Are we good parents?)


아 너무 귀여웤ㅋㅋㅋㅋㅋㅋㅋㅋ


포복절도하는 블랙 유머 영화. 


외동딸을 두고 부모가 벌이는 소동인데 너무 귀엽다. 14살 딸이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던 부모 로렌과 빌은, 딸이 첫 댄스파티를 ‘라이언’과 함께 간다는 소식에 설전을 벌인다. “우리 딸이 레즈비언이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이성애 중심적이었던 건가?” 두 부부가 나열하는 온갖 젠더 룰과 유머를 즐기다 보면 러닝 타임이 다 지나가 있다. 그래서 직접 봐야 하는 영화다. 이 고난도 언어유희 영화를 번역한 여성인권영화제 운영진에게 박수!


루비 파샤의 전설(The Legend of Ruby Pasha)



마지막으로 본 <루비 파샤의 전설>은 시사 팩션의 느낌이 강하다. 천 명 조금 넘게 사는 파키스탄의 한 마을에 곤충학 연구자 루비 파샤가 산다. 그녀는 똑똑하고 아름답고 강한 여성이다. 곤충학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고, 학부 시절에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그런 그녀는 결혼을 원하지 않았고, 이에 약혼자와 그 가족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다. 이때 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루비 파샤의 아버지가 아니라 루비 파샤 본인이다. 그는 총을 

약혼자와 그 가족을 모두 죽이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감독이 원했다면 루비 파샤의 여정에 집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루비 파샤보다는 그의 ‘전설’에 주목한다. 루비 파샤의 행방은 묘연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파키스탄 혁명의 아이콘이 된다. 언론과 사회가 어떻게 루비 파샤를 해석하는지 다양하게 보여준다. “Run Ruby Run!”은 페미니즘과 혁명의 슬로건이 된다. 16분이라는 시간 안에 루비 파샤에 대한 온갖 사회적 현상을 목도할 수 있다. 체 게바라처럼 아이콘이 되는 루비 파샤를 보며, 묘하게 한서희가 생각난 건 나만 그럴까?


우리는~뭣도 모르고~



그 후 여성인권영화제 운영진들과의 토크가 이어졌다. 운영진이나 관객들이나 다 마음은 비슷했다. 모두 여성이 나오는 영화를 원했다. 어딜 가도 남초 상업 영화가 판을 치고, 집 주변에 CGV 아트하우스가 있어도 여성 영화를 보기 힘들다는 관객들의 질문들. 그래서 여성인권영화제는 영화를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페미니즘의 암흑기였던 200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성장해왔다. 나는 운영진에게 번역 관련해서 질문했는데, 아주 웃픈 노래를 들려주셨다. 


“우리는~뭣도 모르고~31편을 선정했고요~트레일러 보고~프리뷰 하고~영화 다시 보고~1차 검수하고~(중략)~5차 검수하고~”


번역하다 밤샐 때 운영진들이 같이 만든 노래란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랬을까 싶었다. 아직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없던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여성의전화는 관객이 한 두 명 밖에 없어도 여성인권영화제를 운영했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한국여성의전화에, 그리고 여성인권영화제에 빚을 지고 있다. 투블럭 머리를 한 사람들이 많았던 관객들 속에서 여성인권영화제를 보고 싶고 홍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아, 제 12회 여성인권영화제는 오늘(9월 12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된다. 

매진된 영화들도 있으니 어서 달려가시길! :) 


제 12회 여성인권영화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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