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한국의 개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너무나 한국적인
글을 반드시 써야 하는 영화도 아닌데 글을 쓰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다. 시사회로 봤던 <나의 작은 시인에게>도 써야지 하다가 못 썼는데, 봉준호 대단하다 대단해. 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지만 기대하고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대 안 하고 가길 잘했다.
봉준호, 이준익 같은 한국 남자 감독들의 영화를 볼 때 가끔 받는 느낌이다. 객관적으로 잘 만든 영화는 맞지만 내 입으로는 칭찬하기 싫은 영화들. <기생충>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한국적인 영화다. 봉준호의 경우에는 이 말이 칭찬이다. 대다수의 한국 영화감독들은 ‘한국 영화’를 만들지, ‘한국적 정체성, 아이덴티티’까지 담지는 못한다. 반면,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 <괴물> 시절부터 한국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고 <기생충> 역시 그런 영화였다. <괴물>이면 모를까, <기생충>의 가치관에 내가 동조를 못했을 뿐.
계단, 냄새, 그리고 리스펙
<기생충>은 한국 사회의 특유의 양극화를 공간과 언어로 잘 풀어낸 영화다. 이 점이 매우 한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이지 않다. 저택, 지하와 계단을 이용한 영화 연출은 고전적인 히치콕 영화들의 오마주로 보였다. 그러나 한국적인 지점이 보이는 공간이 바로 기택네 가족들이 사는 반지하 주택이다. 다른 국가라고 해서 반지하 주택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의 누추하고 비로 잠기는 반지하는 뉴욕의 반지하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 반지하에 어울리지 않는 수석이 뜻하지 않게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로 등장한다.
친구가 갖다 준 수석이 행운이 되었는지, 얼떨결에 과외 선생님이 된 기우부터 시작하여 기택네 식구들은 박사장과 연교의 집으로 하나둘씩 들어온다. 반지하에 있던 사람들은 지상으로 올라오고, 반농담으로 지상의 사람들이 순수하고 착하다 말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박사장과 연교는 기택과 문정, 기정, 기우가 집 안에 계속 들어와도 곧바로 속지 않는다. 그저 선만 안 넘으면 된다. 네 식구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행동하면서 지상의 집으로 침투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요소가 있다. 반지하의 냄새는 스스로 가릴 수 없다. 현실이라면 벌어들인 돈으로 올리브영 향수라도 샀겠지만, 사실 냄새는 <기생충>의 상징이지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요소들이 있다. 옷이 될 수도 있고, 말투가 될 수도 있고, 습관이 될 수도 있다. <기생충>에서 선택한 상징이 냄새였을 뿐이다.
지상의 주택에도 냄새가 있긴 하다. 그 지독한 냄새가 지하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반지하와 지하의 사람들은 냄새를 가린 채 지독하게 싸운다. 계단에 굴러 떨어지고 피를 흘리기도 하며 지들끼리 싸운다. 그러나 자신의 몫을 두둑이 챙긴 이들은 싸움을 모른 채 지상의 주택을 즐기고, 지하의 사람들은 지상의 사람들에게 먹여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들은 가장 원망해야 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한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이지 않은. 깨알 같이 한경 이코노미 매거진에 실린 박사장에게 모스부호로 감사하다 "리스펙!!!"을 외치는 근세는 얼마나 서글픈가. 연교가 키우는 세 마리의 강아지보다 못할지도. 개들을 이용한 연출은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본 독일 드라마 <베를린의 개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 사랑하죠
여전히 나는 이 영화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소수자를 다루지만 묘하게 소수자의 편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여성 캐릭터들을 향한 시선이다. <기생충>은 페미니즘적으로 <괴물>, <옥자>보다도 후퇴한 작품이다. <기생충>이 여성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은 박사장이 무미건조하게 연교에 대해 “그래, 사랑하죠”라 말하는 장면과 유사하다. 괴물을 활로 쏴 죽이던 <괴물>의 남주는 어디 갔는가? 옥자를 기어이 돌려놓겠다며 뉴욕으로 달려 나가던 <옥자>의 미자는 어디 갔는가?
남주와 미자의 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기우의 술수에 빠지는 ‘여고생’ 다혜와 상류층의 백치미(!)를 강조하는 연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충숙은 지상의 집으로 가장 나중에 들어오고 문광은 빚쟁이 남편을 숨기느라 몇 년을 보냈다. 그나마 가장 생명력 넘치던 기정은 기어이 희생양으로 죽여버리고 마네. 여성 캐릭터들의 발전은 전혀 없다. 이정은과 장혜진의 연기 재발견만 존재할 뿐.
계획에 없던 효심
여성 캐릭터 이외에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방식도…글쎄. 개나 곤충과 같은 동물, 다송과 같은 어린아이에 대해 봉준호가 묘사하는 방식은 예전에도 그렇게 공감하지 않았으나 <기생충>은 더하다. <괴물>, <옥자>에서는 어린이가 희망이었다. <괴물>에서 강두의 딸 현서는 죽지만, 강두와 어린아이 세주는 라면을 나눠먹으며 다시 희망을 찾는다. <옥자>의 미자는 결국 옥자를 구하는 데 성공하고, 할아버지 희봉과 함께 식탁에서 고기를 치워버린다. 그러나 <기생충>의 다송은 결국 상류층에 불과했던 걸까. 다송은 냄새와 예술에 예민하고 인디언 모자를 썼지만, 모스 부호를 다 해석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다송의 자리에는 기우가 들어간다.
젊은 기정과 기우는 아버지 기택에게 계획을 물어보지만, 기택은 계획이 없다고 계속 말한다. 계획에 없던 기택과 근세의 살인극이 끝나고 기우는 주택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른다. 기택은 반지하에서 지하의 인간이 되었다. 기우는 수석을 산에 갖다 두고 기택의 모스 부호를 해석한 후, 지상의 집을 사고 말겠다는 허황된 다짐을 한다. 그곳에 충숙과 기정의 자리는 마땅히 없다. 트위터에서 누가 그러더라. 문화행사로 <기생충>을 단체 관람하는 노년층과 함께 영화를 보아서 반응이 궁금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다들 기우의 “효심”에 감복했다고.
봉 감독님. 그런데 전제가 틀렸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꼽등이와 파리는 기생충이 아니에요. 꼽등이는 기생충 연가시의 표적이 되기도 해요. 그들은 기생충이 아니에요.
PS. 극장 잘못 걸렸다. 한 상영관에 반딧불이가 5명 이상일 줄이야.